헛소리 모으기 2. 우리의 소비 패러다임
5월이 되었다.
시기상으론 봄이라고 부를 때지만, 날씨는 초여름 날씨나 다름없었다. 그에 맞춰 낮에는 기온이 꽤나 높아지기도 했다. 지인들과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날씨의 영향이 있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배스킨라빈스라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배스킨라빈스 말고 다른 곳은 없나?”
길을 가던 중, 일행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다들 갑작스럽다는 눈치였지만, 왜 그러냐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리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이 왜 배스킨라빈스를 꺼려했는지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챘었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SPC 그룹 불매운동이 언제 시작된 일인지 찾아보았다. 2022년 10월 15일. SPL 제빵공장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사망한 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반이 조금 넘은 시기였다. 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아직 SPC 계열사에 대한 불매의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건 이 일이 처음이었다.
오늘 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소비자는 무언가의 상품을 얻고자 한다면 돈을 지불해서 얻어와야만 한다. 그리고 생산자는 그 돈을 통해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 낸다. 사실 이러한 원리는 고대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기본적인 경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돈의 순환이 경제 시스템의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산자 역시 상품을 생산, 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없을 것이다. 생산을 할 수 없는 생산자는 더 이상 생산자라고도 부를 수 없다. 마르크스적인 표현으로, ‘생산요소’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이러한 측면에선 불매운동이란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물리적 방법은 제외하겠다.) 논의를 좀 더 진행하자면 경제학이니 유물론이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여기에서 다룰 것은 아닐 것 같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딱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불매운동은 소비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권력이다. 생산자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불매운동만큼 직접적이며 큰 파장을 일으킬 방법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아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 꽤 놀랍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매운동은 보이콧(Boycott)의 하위분류다. 이 ‘보이콧’이라는 단어가 출현한 것은 불과 150년도 되지 않았다. 인류의 경제활동이 몇천 년의 역사를 거쳐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제의 일과도 같다는 생각을 든다.
최초의 보이콧
보이콧의 어원은 실존인물이었던 찰스 커닝엄 보이콧(Charles Cunningham Boycott, 1832~1897)으로부터 나왔다. 잉글랜드의 노퍽 주(Norfolk)에서 태어난 그는, 성인이 된 후 군 장교로 임관, 아일랜드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는 제대 후 소규모의 토지 임대주로 살며 토지 관리에 대한 경험을 쌓아 나갔다. 그 후 메이요 주(Mayo)에서 토지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생활을 꾸려갔다.
당시 아일랜드는 대기근이 사람의 목숨을 휩쓸며 지나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도 지주들이 쓸어가는 소작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횡포에 아일랜드인들의 단체를 만들어 지주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1879년 결성된 아일랜드 토지연맹(Irish National Land League)은 영국 의회를 상대로 소작농의 권리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사회운동은 찰스 보이콧이 관리하던 토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찰스 보이콧은 아일랜드 토지연맹의 운동에 참여한 소작농들을 강제로 추방하며 마을 주민들과 갈등을 만들게 된다. 이에 주민들은 찰스 보이콧을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농작민들은 노동을 거부하며 마을의 모든 상점은 찰스 보이콧에게 아무런 물건도 팔지 않았다. 그의 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역시 일터를 떠나고 우체부들은 찰스 보이콧과 관련된 배달물은 취급을 거부했다. 마을에서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최초의 ‘보이콧’ 사례는 신문 기사를 통해 보도되기 시작하며, 찰스 보이콧의 성이었던 Boycott이라는 단어는 일반 동사로까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따돌림과도 같던 이 최초의 보이콧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찰스 보이콧은 모두에게서 격리되었고, 그가 관리하던 토지에선 아무런 농작물도 수확될 수 없었다. 결국 찰스 보이콧은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신문 기사와 찰스 보이콧의 가족들이 보내온 서신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된 아일랜드의 치안판사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경찰과 주둔군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군대는 찰스 보이콧을 마을에서 탈출시키고 고용된 일꾼들이 농작물들을 거둬가며 최초의 보이콧은 씁쓸한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보이콧의 여파는 다른 아일랜드 지역에도 퍼지며 유사한 운동이 발생하였고, 1881년 영국 총리였던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이 아일랜드 토지법을 통과시키며 아일랜드 토지연맹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
소작농들의 추방으로부터 시작된 보이콧은, 소작농의 권리를 확립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이 단순히 ‘보이콧’이란 단어의 탄생과, 아일랜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일화로 남는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콧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집단화된 개인에게 스스로가 변혁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그 이전의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와 일종의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흔히들 중세시대의 특징으로 꼽는 농노제는 당시를 살아가던 소작농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작농들이 자신의 지주, 혹은 영주에게 어떠한 불만을 품더라도 행할 수 있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이 할당받은 토지의 경작권리를 포기하고 영토 밖으로 나가 스스로가 생존을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식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한 개인이 보이콧을 한다고 해서 동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목이나 달아나지만 않아도 다행이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보이콧은 참여의 효과를 입증한 사례이다. 찰스 보이콧이 관리하던 토지에서도 수많은 소작농과 주민이 존재했다. 그 중 단 한 명만 ‘보이콧’을 했다면 과연 그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 한 명에 동조하여 운동에 참여하는 수 십, 수 백명이 있었기에 보이콧은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한 소작농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변화한 보이콧
이후 사회가 바뀌며 소작농과 지주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공장과 공산품이 땅과 작물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소작농들은 도시로 몰려들며 노동자가 되었고, 지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땅 위에 건물을 세우며 자본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제활동을 위해서는 시장에서의 소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소비자’라는 개념 역시 아마 이 시기부터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에 대한 논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 이전까지의 ‘소비자’의 개념은 단순히 재화를 소비하는 사람을 칭했으리라 생각된다. 야생에서 다른 맹수들이 잡아먹고 남은 시체를 청소하는 독수리와 하이에나들… 흡사 그런 스캐빈저와 같은, 자본의 흐름 최말단에 위치하여 생산물의 효용을 다하는 것에 그치는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공산품이 나타난 시점에선, 소비라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해내는 하나의 경제활동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소비자의 자아 인식 역시 발달하었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소비자 기업을 움직이는 동력임을 깨달으며, 자신의 소비를 재고하게 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955년 일어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다.
당시 앨라바마 주(Alabama) 몽고메리에선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키는 도시법령이 존재했다. 버스 안에선 흑인과 백인은 각자 다른 좌석에 앉아야만 했으며, 백인이 요구하면 흑인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는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었고 당연한 법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몽고메리 백화점에서 일하던 로자 파크스(Rosa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 역시 이 법에 예속을 받는 흑인 중 하나였다.
12월 1일, 백화점에서 일하고 퇴근하던 그녀는 버스에 올라 집을 가고 있었다. 퇴근시간대 버스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날 역시 금방 좌석이 꽉 차고 말았다. 흑인 전용석에 앉아가던 로자 파크스 앞에도 다른 백인 승객이 하나 둘 서기 시작했다. 버스가 차자 기사는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흑인 승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로자 파크스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흑인들의 지역 커뮤니티에 알려지는 것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건에 분개하며 지금까지 당연시되었던 인종에 따른 버스 좌석 분리 철폐, 흑인 운전사 비고용 관례의 폐지를 요구하며 보이콧 운동을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기 전까지 몽고메리에서 운행되는 버스를 타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당시 버스 승객의 다수를 차지하던 흑인 소비자가 사라지자 버스 회사는 곧바로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흑인들은 도보부터 카풀, 택시 이용 등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보이콧을 이어갔다.
시 당국도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진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대처 방식은 더 한 차별을 통해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카풀 운전사의 운전면허를 취소시키고 자동차 보험사에도 이들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흑인 승객에겐 할인된 요금을 받는 택시기사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 정부의 대처로 인해 더더욱 많은 사람이 보이콧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고 몽고메리를 넘어 미국 사회의 이슈로 확대되었다. 결국 다음 해인 1956년 12월, 대법원은 몽고메리의 도시 법령을 위헌으로 판결하며 흑인들은 다시 버스에 탈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는 것. 이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소비자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몽고메리에서의 사건으로 보이콧의 위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세계 각지에선 크고 작은 다양한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일일이 기재하는 것은 지면만 낭비하는 것일 테니 자제하겠다. 당장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지난 몇 년간 많은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만큼 소비자들은 자신이 생산자를 거부할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인지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가며 보이콧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시기를 거치며 많은 변화도 거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보이콧 운동의 기조는 여전하지만, 그 성격은 과거와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나는 과거의 보이콧과 오늘의 보이콧은 사고관의 영역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의 보이콧은 효용과 교정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보이콧을 벌이는 일차적인 원인은 소비자 자신의 안위에 있다. 가령 재화가 자신과 주변 환경에 해를 가하거나, 직접 자신의 생계에 위협이 된다면 이를 거부하고 비슷한 개인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기업에 압박을 가해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자 한다. 보이콧의 결과로 자신의 안위가 확보된다면, 보이콧 운동이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오늘의 보이콧은 책임 의식을 통해 작동한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자신의 소비에 막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도덕한 재화가 있다면 이것을 소비하는 것 역시 부도덕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재화를 생산하는 기업에 돈을 주면 기업은 그 재화를 재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재화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직접적인 악행이라면, 이를 소비하여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쥐여 주는 것 역시 간접적인 악행이 된다. 그러므로 소비자는 자신의 소비행위가 악한 소비인지, 선한 소비인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소비에 도덕의 개념이 들어선 것이다.
이 덕분에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보이콧 운동의 성공 기준 역시 더욱 높아졌다. 기업의 사죄와 재화의 변화를 넘어 해당 기업 주가의 폭락, 더 나아가 기업 파산의 수순까지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보이콧을 통해 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꼴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도덕이 관여해서 그런 것일까? 마치 범죄자가 어떠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통쾌하다고 반응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 책임 의식은 소비자의 식별 범위를 한층 더 확장시켰다. 여기서의 식별 범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소비자가 확인하고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말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소비가 단순히 재화의 효용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소비하는 것으로 인해 나는 물론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더 나아가 범지구적인 영향력이 발휘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20세기까지의 소비자의 식별 범위는 개인과 그 주위까지였다. 그에 반해 현재의 소비자 식별 범위는 만 Km 이상 떨어진 지구 정반대 편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의 생태계까지로 넓어졌다. 심지어는 물리적 실체가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범위로까지 확장되었다. 근 몇 년 간 친환경과 비건, ESG, 지속 가능한 성장 등의 개념이 각광받은 것도 이의 일환일 것이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지금 당장의 효용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 재화를 소비함에 따라 발생할 미래의 가능성까지도 고려하게 되었다.
기업 역시 이에 발맞춰 자신들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홍보는 자신들의 제품이 얼마나 뛰어난 지, 이 제품이 당신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에 못지않게 자신들의 제품이 얼마나 도덕적인지, 그리고 이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얼마나 올바른 행위인지를 홍보하기도 한다. 당장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제품을 보더라도 성분표나 주의사항 같은 정보의 이미지보다, 이 제품이 어떠한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등의 다른 정보를 알려주는 이미지가 더 큰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을 것이다. 소비자가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은 채 안심하고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날 기업들의 우선 과제가 되었다.
이 현상의 원인에는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발전한 정보기술도 한몫을 할 것이다. 오늘 소비자들은 기업에 대한 정보를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기업에서 무슨 사고가 발생한다면 소셜 미디어와 뉴스에 바로 보도가 된다. 그리고 그 기업의 운영자가 누구인지, 계열사로는 무엇이 있는지, 또 다른 기업과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를 후원하고 과거에는 어떠한 유사 사례가 있는 지 등 등… 한두 번의 클릭만으로도 이러한 정보는 물밀 듯이 쏟아진다.
내 지인이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을 꺼린 것 역시 이 변화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한 것이 아이스크림 한 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하지만 오늘의 소비자들에겐 너무나도 상관이 있다. 사망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그 기업과의 계열사를 소비하는 것은 간접적인 책임을 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명사고를 넘어 외교적 관계, 생태환경, 전쟁, 사회운동까지도 고려하며 소비하는 것이 지금의 소비 패러다임이 되었다.
나 역시 한 명의 소비자로서 이 패러다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내가 ‘나는 소비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한들, 이미 생산되는 갖은 재화는 내가 책임질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입증하듯 같은 분류의 상품을 구매하더라도 비건 인증을 받았거나 공정무역을 거친 상품에 더 눈길이 가고는 하니까.
이러한 현재의 패러다임 역시 미래에는 변화할 것이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무엇일지 나는 알 수 없다. 그 문제는 적임자가 따로 있는 영역일 것이다. 나로선 그저 그러한 시대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마 그 시대상을 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시화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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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0, Mathieu St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