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모음집 3. 나는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3.8%.
통계청의 인구동향조사에서 나온 2023년 조혼인율의 수치이다. 조혼인율이라 함은 인구 1,000명당 혼인건수를 말한다. 즉 작년 한해 결혼한 사람을 모두 합하더라도, 1,000명 중 4명을 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에는 이 수치가 9.3%였다고 한다. 단순계산으로 보자면, 34년의 세월이 지나며 우리 사회는 결혼하는 사람이 60%나 감소한 셈이다.
비혼은 이미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그것을 걱정하거나 우려하는 것을 넘어, 이미 우리 현실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돼 버렸다. 많은 이들은 이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1분기 출산율이 몇 %네 하면서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봤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 사회가 어찌 된다거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조치를 해야 한다거니, 원인이 뭐라거니 등…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말들이 오갔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기는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나도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비혼주의자이다. 딱히 결혼은 하고 싶지 않고, 자녀를 갖는 건 더더욱 꺼려진다. ‘너 같은 놈들 때문이다.’라고 비난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맞는 소리니까.
내가 왜 비혼주의자가 되었을까? 한번은 이것에 대해 조금 고민해본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가 보니 내가 처음으로 비혼 선언을 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역산해가면 2010년이나 2011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어쩌다 학급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때 다들 자기는 미래에 얘 몇쯤 키울 것이며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느니 까마득한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난 결혼 안 하려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코웃음을 치거나 이상하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다들 나보고 별난 소리를 한다고들 했다. 마치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결혼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흔치 않았으니 그러한 반응이 이상하진 않았다. 대부분 부모님이 있고 하나, 혹은 둘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나고 자라난 만큼, 자신도 같은 가정을 갖는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니까.(당시 그런 반응을 보인 학우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럴 때는 동창회 문화가 쇠퇴한 것이 조금은 아쉽다.)
당시 내가 그런 비혼 선언을 한 이유는 나도 딱히 알 수 없다. 그냥 그 시절부터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혹자는 가정을 갖는 것은 축복이라거나, 자식을 키워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에 딱히 공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을 겪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다들 열심히 결혼을 찬양하는 것 치고는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가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무튼 그때의 비혼 선언은 십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너 같은 소리 하는 애들이 제일 빨리 결혼하더라!”라는 덕담도 아직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가며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져만 갔다. 스스로도 이를 느끼며 이제는 ‘주의자’라고 자처할 수 있을 만큼 나의 정체성은 확립되었다.
나도 이제는 마냥 젊지 못한 나이가 된만큼, 주변에도 결혼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음 주 주말에도 대학교 한 학번 선배의 결혼식을 갈 예정이다. 비록 내가 비혼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결혼식에 갈 때마다 신랑 신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회의감을 느끼기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 그리고 나는 평생을 함께 파트너를 찾았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는 모든 커플들이 부디 그런 행운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나는 결혼을 하는 대부분의 커플은 그러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네가 뭔데 함부로 판단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도 나날이 늘어가는 이혼율이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이혼하는 모든 가정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들이 이혼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불화가 동반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불화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발생할 것이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이혼 가정들이 내 바램과 달리 평생의 파트너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다른 한편으론 나날이 고공 행진하는 이혼율을 보면서 내가 틀리진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느낀다. 참 간사하고 옹졸하며 모순적이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됨됨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지. 이처럼 나는 모순과 양가감정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다.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이건 논거가 없는 나의 주관적인 선입견에 불과하기는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나라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조금은 부담되는 몇만 원의 축의금을 낼 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좀 오래가고 얘도 많이 키워야 할 텐데...’ 아직 주변 사람들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진 못했지만, 뉴스에서 허구한 날 들리는 저조한 출산율의 소식이 마냥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이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어딜 가나 떠들어대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동기가 있다. 스스로 말하고도 정말 쓰레기스러운 발언을 한 것 같다. 이왕 말이 나온 거, 솔직하게 좀 말하도록 하겠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결혼하고 자녀를 길러주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사회구조라는 것이 인구를 기본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나는 비혼주의자지만 결혼을 장려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꽤나 먼 과거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많은 학자의 의견을 따르자면 석기시대라 부르는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타인과의 결합과 자손 번식이 행해졌겠지만, 그것이 ‘제도’의 형태로 규격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제도의 발명 이후 다양한 문화권에선 다양한 형태(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모계사회, 부계사회 등…)로 결혼 제도가 발전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문명이라 자처하는 집단에서는 결혼을 법의 테두리에 가두기 시작했다. 이 관습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현대의 대한민국에서의 결혼은 민법 제812조로 명문화되어 존재한다.
왜 결혼을 하는가? 이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혹자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고, 혹자는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하고, 혹자는 사회의 외압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 모두가 결혼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오직 단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기혼자들은 각자의 동기와 이유가 다를 텐데, 이를 단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어폐가 있다.
위의 사유로 인해 나는 결혼의 이유를 따지기보단, 결혼의 원리를 따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유를 따지지 않는 까닭은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는 논의에 당위성이 부여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당위성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다룰 예정이므로 여기선 짧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유는 타당함을 요구한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그 이유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혹은 발생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검토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진다. 따라서 결혼을 하는 이유가 무언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가치판단을 하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가치판단으로 인하여 결혼을 하지 않는 타당한 이유를 요구하게 되는 넌센스적인 상황이 연출되어 버린다. 때문에 여기서는 왜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지를 말하진 않겠다. 나는 어떻게 사람들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일지를 묻고 싶다.
이 질문이 이유를 묻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질문이다. “얼음은 왜 녹을까?”라는 질문과 “얼음은 어떻게 녹을까?”라는 질문이 다르듯이 말이다. 전자의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어렵다. 이를 대답하기 위해선 얼음의 분자구조와 화학적 지식, 미시세계에서 작동하는 물리학, 열역학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뭘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이야기하느냐고? 그렇다면 잠시 이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얼음이 왜 녹는지를 직접 설명해보도록 하자. “주위 공기의 온도가 얼음보다 높으니까 녹지.”라는 대답을 하는 순간, “왜 그런 기온의 차이가 얼음을 녹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그것을 대답하면 그러한 원리는 왜 발생하는지를 따지게 한다.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어렵다.
그에 반해 “어떻게~”라는 질문은 상대적으로 대답하기 용이하다. 열의 이동을 통해 얼음은 액체상태로 변하게 된다. 열의 이동이 무엇이고 어떤 과정으로 얼음이 녹는지는 과학 교과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고 전문가들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왜’와 ‘어떻게’를 혼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왜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다. 반대급부인 “요즘은 결혼을 왜 안 하는가?” 역시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선 당장에도 몇 가지 대답이 떠오른다. 이를 종합하면 가장 포괄적으론 관계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된다.
머나먼 과거,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왔다. 정서적이든 육체적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를 만들고 오늘 날의 인류도 만들어졌다. 이 관계를 일종의 규범으로 규격화한 것이 오늘 날의 결혼 제도의 토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뭉뚱그려진 안이한 답변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관계야 말로 결혼이란 제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의 시작인 혼인, 과정인 가정, 그리고 끝인 이혼까지, 결혼에는 관계의 생성과 소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로 맺어온 관계, 앞으로 맺어갈 관계로 인해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선택하게 되었다.’라는 피동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가 이들의 선택지를 대폭 줄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지난 몇천 년간 전통처럼 뿌리내려졌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배의 용골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결혼 말고도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용골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혼’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최근의 일이니 말이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거나, 신혼여행 없이 법적 절차만 밟는 이들도 있다. 반대로 결혼식은 하되 법적인 부부 관계를 맺지 않는 이들도 있다.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같이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과거처럼 결혼과 비혼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지 않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선택지의 확장은 더 큰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결혼 제도를 거부한 이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이들에게 그 목소리가 닿기나 할까? 심지어 결혼한 이들에게도 육아는 선택사항이 되었다. 아무리 사회 안팎으로 인구 붕괴를 떠든다 한들, 이들에겐 무수한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혼인율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된 것은 현대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도 까지 보인다.
물론 나 또한 이것이 한편으론 우려된다. 바람직하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의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론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방팔방에서 문제라고 떠들어대는데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기에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길러주었으면 한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에서 나는 빼고.
이 이기적인 비혼주의자가 언제쯤 고집을 꺾을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주변 어른들도 다들 내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거라고 일축하곤 한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아직 내가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어보지 못해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배제해둔 것일지도. 하지만 이조차도 내겐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나 의외의 다른 비혼주의자(자발적이든 아니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에게도 결혼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 사회는 이 기울어진 가능성의 천칭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 노력에 내가 일조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혼주의를 권장하지 않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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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18.Melany Roche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