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민주주의의 물결을 타기 전까지, 모든 국가의 역사는 ‘위로부터의 역사’였다. 왕이 결정하면, 국민은 무조건 따라야 했다. 아니, 사실 지금도 그 과도기라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실상은 국민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권력자들이 꽤나 있어 보인다. 심지어 공산당 체제로 알려진 북한의 공식 명칭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게다가 정치와 종교 권력을 함께 거머쥔 왕이 명령을 내리면, 백성들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계사가 그래왔고, 한반도의 역사도 그랬다.
우리는 역사책 초반에 단군왕검에 대해 배운다. 단군은 종교를 관장하는 제사장을 말하며, 왕검은 정치 지도자를 뜻한다. 교황도 지금과는 다르게,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중세 시대가 있다.
고조선을 창시한 단군왕검
교황에게 개기다, 도리어 교황 앞에서 맨발로 3일 간 무릎을 꿇게 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공식적으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민주주의 역사는 단 한 시기밖에 없었다.
그 단 한 번이 바로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기다.
고대, 2,400년 전? 지금의 민주주의보다는 훨씬 후졌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당시의 민주주의 완성도는 정말 파격적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도시 구성
위 그림에서 보듯, 아테네 고지에는 '아크로폴리스'라는 정치·종교·군사 거점이 있었는데, 이곳은 관청·신전·방어 성채의 역할을 모두 담당했다.
‘아크로폴리스’라는 어원은 아래와 같다.
시민의 권력은 신에게서 나왔다.
이게 2,400년 전에 나왔던 문구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정말 과연
“시민의 권력이 시민에게 온전히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맞습니다!”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시민에게 권력이 있다면,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야 하는데, 과거나 오늘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원천은 무엇일까?
결국 '돈' 그 자체이거나, 돈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집권(權)층은 자신의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부를 자기 자식에게 세습할 방법만을 궁리하는 듯하다. 그리고 국민들의 권익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일부 정치인이, 도리어 그들에 기생해 사회 전반의 입법, 사법, 행정권을 도맡으려 하는 경향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대통령·구청장·지방의원과 같은 행정 수장을 뽑을 수 있고, 입법권을 행사하는 국회의원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다는 현실이다. 권력을 시민의 손으로 바꿀 수 있기에, 그 책임 또한 시민이 지게 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민주주의라는 ‘가계’를 운영할 만한 '공동 주주'로서의 지식을 갖춰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실제 역사의 발전 방향은, 여러 투쟁을 통해 이를 시민들이 하나씩 쟁취해 갔던 게 사실이다.
고대 아테네 철학자, 플라톤의 명언
1987년,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통령 선거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무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당대 어디에도 없던 혁신적인 정치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다.
...
‘아고라 광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 아닌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과거에 ‘아고라’라는 청원 게시판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현재는 서비스가 종료된 다음 아고라 청원 게시판
오늘날, 국민이 온라인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비슷한 모양새다. 물론, 오늘날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같은 공신력은 없었지만, 시민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갖가지 정치 논쟁이 오갔고, 광우병 시위를 포함해 여러 정치 집회를 주도했던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다음의 아고라 광장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당연히 고대 그리스 아고라 광장도 비슷한 역할을 했었다. 아니,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그것은 21세기의 것보다 공신력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고대 아테네 도시 복원도 (출처 : pininterst)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상업이 꽃피기 마련이다. 아고라 광장은 오늘날 광화문 광장처럼, 활발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다양한 시민들이 이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곳으로 돈이 모이고, 경제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경제권을 가진 아테네 시민들, 즉 아테네의 남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장소가 바로 '아고라'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는 조선 후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조대왕 시기, 서울로 몰려드는 지방의 몰락 농민들이 종로에 노점상을 한창 펼치던 때다. 그래서 영의정 채제공이 이 불법 노점상들을 합법으로 돌려서 한양에서도 미천한 신분의 돈 많은 사업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성장하면서 조선의 신분 질서에 균열이 확대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도성 주변의 상업 발달을 그림으로 표현한 김학수 화백의 「종로」
영화 '아고라' 스틸컷
다시 고대 그리스와 오늘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와 보자. 심지어 아고라에서 연설하는 모든 시민들의 발언은 법적으로 보호되었다. 마치 오늘날 국회의원이 국회 내에서 한 발언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45조).
이는 오늘날엔 국회 내에서만 허용되지만, 당시 그리스에서는 이 권리를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제였고, 오늘 대한민국은 선거로 뽑힌 정치인들이 국민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간접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이다.
결국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선진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중산층의 강화와 그에 따른 시민 계층의 활발한 정치 참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