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두의역사 Mar 13. 2020

콜럼버스는 과연 위대한 인물이었을까?

#9 대항해시대를 통해 본 황금만능주의


나 모두의역사가 역사를 잘 몰랐던 시절, 콜럼버스라는 인물은 나에게 위대한 인물이었다. 당시 내 선망의 대상이었던 USA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스페인 사람! 그리고 '지구는 네모나다'는 고정관념을 뚫고 목숨을 걸고 항해한 인물!




나에게 콜럼버스는 그 정도로 기억됐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를 배워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

.

.





대항해시대의 주인공이었던, 당시 스페인의 정세는 어땠을까?



당시 스페인(왼쪽 노란색)


서유럽 왼쪽 끝자락 이베리아 반도(위 사진 노랑)에 묶여있던 스페인은 십자군 전쟁의 연장 선상인 ‘기독교 회복 운동(레콘키스타)’을 통해, 그라나다(알람브라 궁전)를 탈환하며 이슬람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새로운 기독교 국가를 탄생시켰다. (스페인 왕국)


그렇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5C~15C까지, 무려 1천 년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기독교 회복 운동을 계기로 현재까지 다시 기독교 국가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정복지 알함브라 궁전.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드라마 (출처 TVN)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 내부. 이슬람교의 아름다운 궁전 양식이 아직까지 보존되어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을 치른 직후, 힘이 부족하던 신생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베네치아 공국 때문에 지중해로 나갈 수 없었다. 북쪽 대륙은 초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막혀있었다. 남쪽 북아프리카는 이제 겨우 몰아낸 이슬람 세력의 본거지였다. 동쪽, 남쪽, 북쪽이 다 막힌 암울한 상황...  


남은 길은 단 하나... 서쪽인 대서양로였다.     


당시 스페인(왼쪽 노란색)은 동, 남, 북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역사 속의 모든 새 질서는 변방에서 생기는 법



당시의 아메리카가 존재하지 않던 기독교 세계관 상, 지구의 서쪽 끝은 스페인, 동쪽 끝은 일본이었다. 이 두나라의 공통점은 세계를 세계사를 뒤흔든 적이 있는 '변방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서쪽의 끝: 스페인(포르투갈)   /   동쪽의 끝: 일본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구가 네모나다는 건 교황이 공시한 상식이었고, 이를 거역하는 순간 이교도 혹은 사이비로 몰리는 형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양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유럽 기독교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종교의 권위에 도전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출처 : SK story)




신 중심 세계 종식의 신호탄을 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교황권을 통해 생각을 지배받던 유럽인들에게, 배를 타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일은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모든 항해사들이 대서양 끝으로의 출항을 시도하지 못했다. 지구가 네모난 것은 진리인데, 누가 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겠나? 대서양의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 폭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동양과의 무역이 절실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네모난 지구 바다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박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천동설이 당연했던 당시의 기독교적 세계관



그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있던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 때처럼, 모험을 통해서 큰 부를 쌓겠다는 희망 하나로 용기를 냈다. 인도와 대서양 무역로만 확보한다면, 당시 유럽에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팔리던 동양의 후추와 비단으로 큰 유통마진을 남길 수 있었다.




후추의 위엄 (출처 : 대항해시대 두부)




모든 비즈니스는 리스크가 클수록 얻는 것도 많다.




앞선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십자군 전쟁은 기사들이 자신의 영지를 탈환하고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목숨을 담보해야 했고, 성지를 빨리 탈환하지 않으면 군수품에 대한 이자가 계속해서 불어났기 때문에 위험부담 또한 컸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에서도 기독교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학살을 자행하라 하신 적이 없는데..ㅠㅠ)







대항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베리아 십자군’으로 빚을 져 돈을 갚아야 하는 기사들은 무역로를 찾아야 했다. 그 1호 주자가 바로 스페인의 이웃 국가, 포르투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자군 원정 때와 같은 ‘잔인함', 그때와 같은 엄청난 속도로 아프리카 해안을 모두 점령해 갔다. 포르투갈은 7천 년 동안 못했던 아프리카 해안 정복을 불과 50년 만에 이룩했다. 투자자에게 쫓기지 않고서야 절대로 불가능한 속도였다.



직거래의 욕망이 만든 포르투갈의 세계 일주로



스페인의 사정은 더 급박해졌다. 옆 나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항구를 순조롭게 점령해 인도와의 직교역로를 결국 선점했다. 따라서 스페인이 갈 수 있는 길은 대서양밖에 없었고, 그 첫 번째 주자가 바로, 역사를 몰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던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와 그의 무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예전의 나를 포함해, 


지금도 콜럼버스가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가지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꽤나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에게 그런 대의명분 따위는 1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제일 처음에 포르투갈 왕에게 가서, 대서양 유람의 투자 유치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아래의 조건을 요구했다.


1. 기사와 제독 작위
2. 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 얻은 총수익의 10분의 1


하지만 이미 배가 부른 포르투갈에게, 콜럼버스의 터무니없는 제안이 먹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를 통한 교역로를 뚫어놓았다. 포르투갈 왕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그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에게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이제 막 통일을 이룩해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던 터라, 콜럼버스의 이 제안을 받아들여 대서양 항해를 지원했다.






콜럼버스는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시킨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알고 있지만, 그의 행적은 사실 전혀 존경받을 만하지 못했다. 그는 원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노예화하고 학살했다. 그리고 금을 캐오게 하여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을 자르기까지 했다.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손이 잘려나가는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원주민




그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그는 현재 미국이 탄생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를 만들었고,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유럽의 수많은 기사 계급 출신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러 모험을 떠났다.




이들도 배를 빌리고, '투자'라는 명목의 돈을 빌려, 이자를 빠르게 갚아야 했다.

 


특히 멕시코 정벌의 일화가 가장 유명하고, 규모 또한 가장 끔찍했다.


1519년 당시, 멕시코 시티는 인구 700만이 사는 거대한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 국가였다. 단지 문명의 발달 속도만이 유럽보다 늦었기에, 그 수준은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무기는 당연히 나무칼 정도밖에 안됐던 수준이다.




15세기 테노치티틀란(현 멕시코시티) 복원도




만약 이슬람 문화권이 당시 멕시코에 접근했더라면, 유럽 제국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동남아시아로 가서 이슬람교를 퍼트리고 교역하던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슬람은 타문화를 존중하고, 그들과 서로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거래를 했다. 그 때문에 7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슬람의 발상지와는 생뚱맞게 떨어져 있는 인도네시아에 2억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 인도네시아 종교지도. 인구의 80%가 이슬람교도




하지만 유럽 기사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루라도 지체하면 투자에 대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던 상황이다. 그들은 약 천여 명의 병력과 총포탄으로 인구 700만의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거기 있던 금을 깡그리 쓸어갔다. 심지어 원주민 몸 안에 혹시 금장식이 있을까 해 시체까지 찢어발겼다.




코르테스의 군대가 테노치티틀란 원주민의 몸수색(?)을 하는 모습...




경제적 관점에서 이 학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서유럽의 기축 통화가 '금'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는 금의 매장량이 많았고, 이를 한 줌이라도 얻기 위한 스페인의 몸부림은 대학살이란 결과를 낳았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 인간 존중의 철학을 만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재앙을, 우리는 대항해시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음화 계속...)






모두의역사 인스타그램 (역사 명언 풀이)




<  쉽지만, 유익한 역사 이야기를구독해 보세요 ^^  >


- 매주 화, 금요일 오후 3시 업로드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십자군 전쟁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