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사람, 꿈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by 모두미

고등학교 때 우리학교에 새로운 미술 선생님이 부임 하였었다.

남자치고는 꽤나 긴 머리를 가지고 계셨던 선생님은 가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우아하게 넘기곤 하셨다. 서울에서 오셔서 더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셨던 선생님은 다른 어떤 미술 선생님보다 강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 왔다. 진정한 예술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선생님은 우리와 수업을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소질 있는 학생들을 뽑아 특별 미술반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의미하는 특별 미술반은 그냥 방과 후 미술반이 아니었다.

미술반이 된다는 의미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말이었고 또 선생님께 인정받는 가능성 있는 학생이 된다는 의미였다.


고등학교 일학년, 우리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 때 누군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정해주기를 기대하던 그때. 선생님의 제안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게 숨어 있는 미술적 재능이 있는지 몰라.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내 잠재되어 있던 미술 감각을 선생님이 알아차릴 수도 있어.’

몇 시간의 미술 수업이 지난 후 그림 그리는 모습과 결과물을 보고 선생님은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하던 말씀이 있었다.

“야. 우리 해옥이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나. 강아지를 진짜 강아지처럼 그리네.”

아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고 어쩌면 아빠가 제일 먼저 발견했던 나의 재능이 정말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며 나의 이름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그랬다. 나의 그림은 선생님의 눈에 띌 만큼 잠재력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나의 그림은 평범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나의 작은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고 내 친구들은 특별반에 참석해 좀 더 심도 깊은 미술을 배웠다. 물론 그 친구들 중에 진짜 미술을 전공한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20년이 지나 나는 다시 그림을 시작했다.

이제는 좋은 붓을 살 수도 있고 그림에 필요한 재료들을 살 만큼의 여유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내게 없던 잠재력이 생긴 것은 아니다. 또 나를 미술 특별반으로 선택해주는 선생님이 계신 것도 아니다.

수강료만 내면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고 인터넷 강의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어렸을 때의 그 작은 꿈을 포기 하지 않는 내가 있다.


비록 지금은 줄긋기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내 작품이라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림을 그리는 그 단순한 기쁨과 무언가를 배우는 배움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사이 나는 다시 핸드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틀어 놓고 줄긋기를 한다. 조용한 밤 스케치북 위로 지나가는 연필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 나는 멋진 화가가 되어 밤하늘을 스케치 한다. 내 꿈을 스케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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