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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May 12. 2020

남을 돕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인도에서 사회봉사를 할 때 만나는 어려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인도에 봉쇄령이 내려진 지도 벌써 한 달 반이 지나가고 있다.

13억의 인구라는 거대한 나라 인도.

인도에 코로나가 시작되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곧바로 전 국민 봉쇄령을 내렸다.

그리고 봉쇄령이 길어지자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 뿐 아니라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일을 찾아 대도시로 향했던 많은 일용직 자들이 봉쇄령에 직장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버스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수백수천 킬로미터의 길을 걸어서 고향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는 봉쇄령으로 거리를 감시하는 경찰을 피해 기차 길을 따라 고향으로 향하던 사람들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피곤해서 기찻길에서 잠을 자다가 화물을 운송하는 기차에 치여 여러 사람들이 죽은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14시간 정도 떨어진 콜카타 지역에서는 코로나 봉쇄로 인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네 가족이 동반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식이었다.   


남편과 나는 적어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도와 보자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로 쌀 나누기 봉사였다.

인도의 상황을 들은 지인들이 도움을 주어 자금을 모으고 쌀과 달(인도 곡물) 그리고 기름, 콩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포장했다.

남편은 인도 친구와 함께 면장을 찾아가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들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12개 마을의 이장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을 받았다. 마을마다 50명에서 190명까지의 명단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그 명단이 늘어날수록 인도 친구들과 우리의 손은 더 바빠졌다.

지난주 동안 6개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한 곳에 6명 이상 모일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트럭으로 집집마다 쌀과 먹을 것을 배달하기로 했다.

자동차 앞에는 “긴급 구호 물품”이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자동차 앞쪽 서랍에는 경찰서에서 받은 차량 이동 허가증을 넣어 두었다. (경찰이 긴 막대기를 가지고 봉쇄령을 어기는 사람이나 자동차는 사정없이 때렸기 때문에 꼭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작은 트럭이었고 우리 팀도 작았지만 마음만큼은 우리 마을의 유엔 대표였다.


첫 번째 마을도 두 번째 마을도 잘 나눠줬다. 그런데 여섯 번째 마을에서 일이 터졌다.

바로 도움의 손길 위에 정치가 개입된 것이었다.

인도에는 여러 당이 있는데 그 마을에는 BJP(힌두 정당) 당이 있었고 TMC(웨스트 뱅갈 주지사가 창립한 당) 당이 있었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BJP당은 보수파였고 TMC는 진보파였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어려운 상황에,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웃들을 돕는 차가 도착했는데 정치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을 이장이 보수파였고  이장은 보수파 쪽의 가난한 사람들  이름만 써서 낸 것이었다. 그러니 진보파에 속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의를 제의할 만했다. 보수파 BJP당은 구호물품을 다른 정당에 나누기 싫었고 진보파 TMC당은 억울했다. 논쟁은 더 큰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을 보던 우리는 조용히 차에 시동을 걸고 무리를 빠져나왔다. 일단 후퇴한 것이다. 쌀 보따리를 잔뜩 싣고 유유히 싸움판을 지나가는 우리 차를 보며 마을 사람들도 당황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다툼을 이어가고 있었다. 싸움이란 것이 그랬다. 한 번 마음 상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어떻든 목소리를 높이게 되니까 말이다.


우리는 살짝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면장에게 전화를 했다. 면장은 마을 이장 협회 회장에게 연락을 했고 결국 마을에는 이장 협회 회장과 면장이 보낸 비서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쌀 나누기를 돕기 위해 출동한 특별 팀은 한 시간 가량 흥분한 몇몇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트럭 뒤에 앉아서 특별 문제 해결 팀들이 마을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남편은 말했다.


“정치는 사실 사람들을 돌보는 건데. 잘못된 정치는 사람들을 굶겨 죽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지?”


남편 말이 맞았다. 이념이 맞지 않다고 우리 당이 아니라고 외면해 버린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말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소외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별 문제 해결 팀과 우리는 준비했던 쌀의 반을 나누어서 보수파 당과 진보파 당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평화 협정이었다.

자기들이 가진 명단을 비교하는 대표들

먼저 목소리가 유난히 컸던 보수파 당 청년 한 명과 함께 이장이 준 사람들의 이름을 들고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양철집에 사는 사람들, 대나무로 만든 집에 사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와서 쌀과 식품들을 받아 갔다.

몇 집을 전해주고 있을 때 갑자기 빡빡머리를 하고 손수건으로 입 부분을 가린 청년이 트럭 뒤에 함께 탔다. 그는 아까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이었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입이 거칠고 목소리가 커서 내가 우려하는 마음으로 쳐다봤던 청년이었다. ‘하필이면 이 사람이 우리와 같이 쌀을 나눠준다고?’ 나는 걱정인지 짜증인지 모르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좀 전까지 험악한 얼굴로 큰 소리를 내던 보수파 당 청년도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 줄 때만큼은 순박한 동네 청년이 되어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함께 선물했다.

그래도 나누는 것은 행복이다

그날 쌀 나누기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 사실 쌀을 나눠 준 시간보다 그 정치 싸움을 진화시키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 듯하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사람들을 만나고 먹을 것을 전달하는 순간은 참 행복했다. 

트럭 뒤 함께 서서 쌀과 식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던 그 험하게 생긴 청년을 보는데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난 그날 사회봉사를 하면서 두 문장을 되새겼다.

“뼛속까지 나쁜 사람은 없다.” 

그리고 “돕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햋살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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