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할머니 한 분은 항상 예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할머니는 원형 탈모를 갖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머리숱이 적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원형 탈모는 한 부분만 심하게 빠지는 거라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한 번도 내가 탈모에 시달릴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큰 아이가 유치원에 갈 때쯤이었다. 어느새 나는 큰 아이와 둘째 아이들의 창의적인 교육을 위해 밤을 새우며 활동과 자료들을 준비하는 극성 엄마가 되어 있었다.
밤새 인터넷을 찾아 괜찮은 자료들을 모으고 교구들을 직접 만들었다. 낮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기 때문에 매일 밤 아이들 육아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 늦게 잠이 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감고 거울을 보는데 내 앞쪽 머리가 많이 빠진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 육아를 위해 밤을 지새우던 극성 엄마의 최악의 결말이었다.
그때 그 할머니가 기억났다. 나는 절대 탈모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꺼라 생각하며 그 할머니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기억났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여보. 중년이 된 것을 축하해.”
“뭐야. 여보. 내가 중년이라고? 나 아직 마음은 20대인데.”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남편은 자기만 나이가 드는 것 같았는데 이제 나도 인생의 4학년이 되었다는 것에 꽤나 통쾌해하는 모습이었다.
중년. 네이버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또는 그 나이의 사람.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어렸을 적 내가 봤던 40대의 어른들은 꽤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느꼈었는데 내가 40대에 들어와 보니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때의 나이고 대학 다닐 때의 나이며 갓 결혼했을 때의 나였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흔한 어른들의 말처럼 마음은 그대로였다.
“엄마. 내가 벌써 마흔이래요. 아니 나는 아직 20대 청춘 같은데.”
“그래.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은 청춘인 거라. 할매가 돼도 마음은 그대론 거지.”
엄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여전히 젊었을 때의 그 마음 그대로인데 나이만 드는 것 같다고.
“엄마. 이제 아주 조금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할머니가 되어도 마음은 청춘인데 자꾸 나이 들었다고 소외되면 얼마나 속상할까?”
엄마와 나는 그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한참을 통화했다. 이제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나이가 든 것일까?
엄마는 자주 자신의 나이를 6학년 몇 반이라고 표현한다. 여전히 마음은 어리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지금의 부모님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그 나이가 되어야만 이애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어른들을 바라 볼 때 마음을 읽는 안경을 사용한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지 못하는 70대의 어머님이 아닌 무거운 짐을 지고도 다람쥐 처럼 산을 타고 다녔다는 20대의 어머니를 보고, 오래 일했던 건축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계시는 아빠가 아닌 긴 장발머리를 휘날리며 사우디아라비아 해변가에 서 있던 꿈 많던 아빠를 본다.
노안이 와서 책을 볼 때면 안경을 써야 한다는 엄마가 아닌 노란색 저고리에 파란색 한복 치마를 입고 어린 자녀 뒤에서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앳된 엄마를 본다.
마음을 읽는 안경을 사용하니 어른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안아드리고 싶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꿈과 추억을 마음 속에 두고 살게 되겠지. 그때 누군가 겉으로 보여지는 내 모습 이 아닌 내 마음을 봐준다면 내 꿈과 추억을 봐 준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