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던 질문이 있었다.
"트리니티 몇 단계세요?"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체르니 40번까지 쳤어요."(사실 체르니 40번의 23번까지 끝냈던가?)
인도는 한국과 달리 음악대학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다. 국제학교가 아닌 이상 초중고등학교 수업에 음악 수업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인도에서 한국 수준의 음악 대학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음악 실용학과는 본 적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기타, 작곡 등을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 주최하는 트리니티 음악 자격증이 아주 유명하다. 시험을 치고 자격증을 받는 것이다.
자격증은 1단계에서 8단계까지 되어 있는데 책도 사야 하고 시험 응시비도 있기 때문에 사실 영국 트리니티 대학의 아주 지혜로운 음악 사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바이엘, 체르니처럼 수십 년이 지나도 같은 것이 아니라 매 3년마다 책이 바뀌고 그 책을 사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애초부터 트리니티 자격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책 장사 자격증 장사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 왜 책을 3년마다 바꾸냐고?"
피아노를 배우는 인도 아이들 뭐 아무튼. 그랬다.
비록 봉사로 가르쳐 주는 피아노였지만 매번 '트리니티 자격증도 없는 선생?'으로 보는 시선이 싫었다.
'이제는 한국에서 날아온 선생의 실력을 보여주리라. 흥! 그저 자격증인데 뭐 힘들겠어'
인도 생활 10년 차, 그렇게 나는 마지막 단계인 8단계를 신청했다. 그리고 화상통화로 일주일에 한 시간 인도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시험을 위해 주어진 곡들과 스케일을 연습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나 음악을 표현하는 부분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때 배운 6년의 피아노, 그리고 나이 마흔 까지 피아노를 연습해온 경험이 무색해질 정도로 피아노 앞의 내 모습은 하나의 딱딱한 나뭇 대기 같았다. 빠르게 또 박자에 맞게 피아노를 치는 것은 할 수 있었는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보. 영혼을 넣어서 쳐봐."
"엄마. 감정이 없잖아요. 감정이."
남편과 아이들의 조언을 얻어 영혼이 있는 피아노를 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니 부끄러운걸 어떻게 하냐고. 나는 표현을 한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안되냐고."
아~~ 역시 뭐든지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3달을 화상으로 레슨 받으면서 매일 마다 몇 시간씩 연습했다. 그리고 어려운 곡들이 손에 익힐만할 때 드디어 시험이 다가왔다.
인도 아이들과 피아노 코로나 사태로 시험도 비대면 즉 주어진 2주간의 기간 동안 피아노 치는 모습을 녹화해서 영국 트리니티 담당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피아노 스케일을 시작으로 연습곡 두 개 본 곡 세 개까지 모두 한 번에 녹화를 끝내야 한다고 했다. 15분 정도 되는 곡을 녹화하는데 자꾸 실수를 했다.
특히 다 끝날 때쯤 실수를 할 때는 정말 눈물이 날 것처럼 실망스러웠다. 그냥 피아노를 연습할 때는 그렇게 잘 되던 부분이 왜 카메라만 켜면 손에 땀이 잡히고 머리가 하예지는 것인가. 나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정해진 2주의 시험 기간 동안 수 십 번의 녹화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 날 최종 비디오를 완성해 보냈다.
마지막 비디오 녹화가 끝나자 만감이 교차했다. 트리니티 피아노 자격증을 무시했던 지난 시간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비록 음악 대학의 전문적인 교육이 아니어도, 책과 자격증을 돈을 주고 사는 것처럼 보였어도 그것을 준비하는 인도 학생들은 나처럼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과 수고로 얻는 자격증을 내가 무시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적어도 음악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과 노력은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 아침 일찍 피아노 선생님께 문자를 받았다.
"선생님. 트리니티 8단계 시험에 통과하셨어요. 60점이 패스 점수인데 81점을 맞으셨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너무 감사해요. 모두 벌씨 선생님 덕분이에요."
인도 시간으로 새벽 3시였는데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던지 그 새벽에 내게 문자를 보낸 선생님에게 참 감사했다.
인도 선생님들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나면 꼭 거기서 배운 Moral(교훈)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준다. 나도 오늘 이 글을 끝내면서 내가 배운 두 가지 교훈을 말하고 싶다.
'직접 해 보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 논하지 말자.'
'함부로 다른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지 말자.'
*대학교 4학년 때 간호사 국시를 친 이후로 시험을 쳐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 처음 인도 왔을 때 일 년 정도 대학을 다녔는데 그때 시험을 보긴 했었네요.)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나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남편이 기뻐하는 저를 보며 농담을 합니다.
"그래. 여보. 돈만 주면 다 주는 자격증이었어."
저는 남편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뭐라고? 내가 얼마만큼 긴장하면서 연습했는지 알면서~"
"아~ 농담이야. 농담. 수고했어." 정말 남편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려주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저 스스로에게 떳떳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거든요.
하지만 또다시 하라면 음... 고민할 것 같아요. 그리고 피아니스트들 정말 존경합니다.
참, 피아노 연습하느라 글은 거의 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제 끝났으니 글을 좀더 자주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