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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Mar 23. 2022

시간을 비우는 연습

아까운 시간들 속에도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바뀌기도 한다.

한 10년 간 꾸준히 해 온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고 비록 큰 성과를 낸 것은 없지만 여전히 글을 쓰는 것은 내 삶에 소소한 변화를 주곤 한다.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주고 주변의 사물들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해 주기도 하고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또 좋아하는데 사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로망은 넘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기도 한다. 물론 매번 상상 속의 멋진 장면이 아닌 너무 현실적인 나의 그림 솜씨에 좌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노력한다. 잘 그리지 못하면 추상화처럼 그리면 되지 하면서.

악기 연주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배운 피아노를 지금껏 치고 있으니 피아노에 대한 나의 애정은 역사가 길다. 그저 짧은 내 손가락 때문에 옥타브와 옥타브를 연결해서 칠 때마다 다른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어서 좌절하곤 했다. 하지만 영재 어린이들이 그 작은 손으로 엄청난 곡들을 치는 것을 본 후로는 아무 핑계도 대지 않고 있다. 그저 나의 연습이 부족할 뿐이라 고백할 뿐.

물론 피아노뿐만 아니라 칼림바, 기타, 리코더, 플루트 등 가능한 악기들은 다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악기에 대한 욕심이 좀 많다고 할까.

그리고 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해외에 나와 있으면서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졌고 한국이 그립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유튜브에 나와 있는 짧은 드라마 영상들을 보곤 했다. 드라마 속의 대사들을 들으며 한국을 기억했다.


그랬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고 생각될 때도 많았다. 이걸 하려니 저것을 하고 싶고 저걸 하려니 이것을 하고 싶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취미 생활을 바꿔 가며 나의 꿈들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일요일은 달랐다. 다른 일요일 같으면 최대한 빨리 집안일을 한 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악기를 연주했을 텐데 그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더니 그날은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 한쪽이 아팠다. 앉아서 무엇을 하기에는 내 몸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나의 계획을 접고 걷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옆집에 사는 끼를 만나서 출장 간 니끼의 남편 이야기와 키우는 물고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좀 더 걸어가면 나오는 핑키 집에 가서 감기에 걸렸다는 막내아들 조나단을 보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핑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펠리타를 만났다. 남편을 따라 멀리서 이사 온 펠리타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집에만 자주 있었다. 핑키와 나 그리고 펠리타. 우리는 어색하게 앉아서 임신에 대해 아이들을 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줍음이 많은 펠리타도 핑키와 나의 대화(아줌마들의 대화)가 나쁘지 않았던지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펠리타 집에서 나와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소레피 선생님 집을 방문했다. 첫째가 고3인데 지난해 어쩌다 막둥이를 출산하게 된 소레피 선생님. 우리는 잠이든 아이를 바라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이 좋았고 수다 떠는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글을 쓰겠다 생각했다. 나는 바쁘게 더 바쁘게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 나는 몸이 좋지 않은 덕분에 어쩔 수 없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이웃들을 만났고 특별한 주제도 없이 수다를 떨었으며 웃음을 나눴다.

악기를 내려놓고 새소리를 들었고 글쓰기를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책을 내려놓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걸었다.

37도가 넘게 뜨거웠던 여름 어느 날, 그렇게 나는 계획으로 꽉 채워졌던 시간을 비워내는 것을 배웠다.


후끈한 오후의 열기가 나를 감쌌다. 나는 흙먼지 길을 더 활기차게 걸으면서 생각했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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