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두고 여행을 간 가족
나는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별히 인도에서 여행은 항상 도전이다. 기본 10시간 이상에서 길면 며칠을 가야 하는 기차 여행이 있고 염소와 소들 그리고 자전거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일반 도로 같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여행이 있다. 그리고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나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비행기 여행이 있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여행은 한마디로 도전이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인도에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평소보다도 많은 글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처럼 다양하고 매력적인 인도. 나는 인도에 살고 있다.
작년 겨울 함께 일하는 인도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 친구는 마니뿌르 주에서 왔는데 여자 친구는 미얀마 사람이었다. 코로나로 거의 2년을 결혼을 하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했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일한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결혼식 초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사는 팔라카타에서 마니뿌르 까지는 자동차로 1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지만 인도 여행 12년 차 베테랑인 우리 가족에게는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일이었다.
그때가 마침 우리 집 천장 수리를 하던 때였다. 공사 중이어서 집전체가 먼지로 덮여 있었고 간신히 안방에만 모든 짐을 모아 두었을 때였다. 그 와중에 나는 마니뿌르 친구의 결혼식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 캐리어 안에 남편의 양복을 넣고 아이들의 세미 정장을 넣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인도 전통 옷을 고이 넣었다. 옷으로 가득 찬 캐리어는 거실 중앙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가면서 밥을 해 먹을 버너도 챙기고 먹을 것도 챙기고 챙길 것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방 뒤에 우리의 짐들을 잘 쌓아 놓았고 주에서 주로 넘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응급 상황을 대비해 여권도 챙겼다.
아이들이 큰 후로는 처음으로 하는 긴 여행. 나는 친구의 결혼식 보다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에 들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저녁이 되면 어느 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버너를 켜고 한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인도 사람들은 길거리에 앉아 밥을 해 먹는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그 시선을 맛있게 받으면서 라면을 먹었다.
저녁노을이 유난히도 붉던 그날의 하늘.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렇게 우리는 15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달려서 마니뿌르 중심 도시 임팔에 도착했다. 이제 친구가 마련해 놓은 게스트 룸에 짐을 옮기고 편히 쉴 일만 남았다. 우리는 작은 짐부터 옮기기 시작했다.
"엄마. 저 편한 옷 좀 주세요." 아이들은 피곤했던지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그래. 알았어. 그 큰 캐리어에 다 들어있어. 그거 가져가서 먼저 옷 갈아입어."
"네? 엄마 큰 캐리어 없는데요?"
큰 아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캐리어가 없다고? 그럴 리가.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동차 뒤를 한 참을 찾았다. 그 좁은 공간을 찾고 또 찾아봤지만 캐리어는 없었다. 아~~~~ 앞이 캄캄했다.
가족들이 며칠 동안 입을 옷은 모두 큰 캐리어에 넣었는데.
집 천장 공사 중이어서 먼지 가득한 땅바닥에 캐리어를 놓기 싫다고 일부러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건데. 정신없이 차를 타면서 그 캐리어만 두고 온 것이었다. 아~~~ 이 건망증!
결혼 전날 우리 가족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던 예비 신랑의 초대에도 응하지 못한 채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다음날이 결혼식인데 땀과 먼지 범벅이 된 옷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밤이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사야 했다. 칫솔도 속옷도 하나 없었으니.
피곤한데 쉬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아들들의 불평을 들으며 내가 당연히 챙겼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남편의 핀잔을 들으며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아니. 왜 다들 나만 뭐라 그러는 거야? 당연히 모두 같이 챙겨야 하는 거지.'라고 억울해하다가도 짐을 챙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식탁 위에 캐리어를 올려놓은 내 잘못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 서로를 향해 불편한 감정을 날리던 우리 가족들은 구글 지도를 켜고 주위의 옷가게를 찾았다.
인도 친구가 알려주는 마트 이름은 비샬이었다. 이름부터가 인도스러운 이 마트에는 정말 제대로 된 옷이 하나 없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런 옷은 입고 싶지 않았다. 질도 모양도 좋지 않은 옷. 우리의 안 좋은 기분을 더 망가트릴 것만 같은 옷. 그렇게 우리는 비샬 마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래도 입을만한 옷을 사자며 다시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우리 집에서 패션에 가장 관심이 있는 큰 아이가 가게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그곳 주위에는 브랜드 옷가게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속옷부터 신발 그리고 정장까지 인도 최고급의 쇼핑을 했다.(물론 한국의 명품 수준은 아니더라도) 남편은 잘 어울리는 양복을 사서 기뻐했고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서 그리고 나는 우아한 인도 전통복을 사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잔뜩 사 온 옷들을 뜯어보며 다시 분위기는 화기애애 해졌다. 오히려 캐리어를 잊어버리고 온 나에게 고마워하는 분위기였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캐리어를 안 가지고와 앞이 캄캄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사고 싶었던 옷들을 살 수 있었던 환희의 순간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짧은 인생. 매 순간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 언제나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법은 어디엔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가끔은 그 방법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안 가져간 캐리어가 선물처럼 우리에게 쇼핑을 할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