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지난 4월 한국에 갔을 때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쓰기 모임이었는데 우연찮게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해서 나도 참여할 수 있었다.
망원동에 있는 작은 서점이었는데 네 번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아담하고 아늑한 서점 분위기와 글을 쓰러 온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이 넘치던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우연찮게 그곳 책방지기 님이 쓴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목이 마음에 들어 그 책을 샀다.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작가는 10년 동안의 일기를 살짝살짝 보여주면서 또 일기 쓰는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 남의 일기 읽는 것처럼 재미난 일이 또 있을까.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작가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 역시 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한창 일기를 쓸 때는 매 년 일기장 하나 씩을 썼었으니 나도 일기쟁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일기는 월기가 되었고 월기는 연중행사가 될 때도 있었다.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일기장을 펴고 펜을 드는 것 자체가 그리고 거기에 또박또박 글을 적어간다는 그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뭔가 모를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오던 몇 년 만에 드디어 내게 딱 해답을 주는 책을 만난 것이었다.
작가가 한 일은 꾸준히 10년 동안 일기를 쓴 것뿐이었다. 음... 일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그 10녀이란 시간을 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것이다.
-쫙 펴진 페이지 위에 어떠한 포장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나를 기록하는 것. 일기의 희열은 여기에서 온다. 슬픔을 감미롭게 꾸미거나 행복을 거북하게 부풀릴 필요 없이 스스로를 한 겹씩 벗어 낼 수 있었다. 어느 지친 하루에 쓴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 2016년. 스물일곱, 7월 22일
결국 고마운 마음이 이긴다. 그리고 결국 사랑이 이긴다. 그건 진짜다.
-2019년, 서른, 12월 2일
마침표에 닿을 듯 말 듯 겉도는 느낌이 아무래도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내가 충분히 솔직했다 여기는 순간에 글도 못 이기는 척 적당히 따라와 주면 좋을 텐데, 글은 종종 나를 가장 바닥까지 몰고 간다.
-2020년, 서른하나, 1월 21일
"되게 든든한 사람 같아요."
새로 호흡을 맞추게 된 동료가 스치듯 건넨 말. 비로소 먼저 일한 사람이 되게 하는 말. 따뜻한 두유라떼 그란데 사이즈 같은 말(오늘 일 마치고 따뜻한 두유라떼를 그란데 사이즈로 시켜 마셨다.)
평범함 그녀의 일기를 읽을 때마다 나도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다시 올라왔다. 그래. 이거지. 아주 평범한 나의 기록들을 남기는 거지.
그렇게 10년 일기장을 샀다. 모 회사에서 나오는 10년 다이어리. 매 날 짜 마다 10년이 나눠져 있어서 나중에 그날로 돌아가보면 10년 동안의 그 날짜의 나의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는 일기장이었다.
나는 인도에 살기 때문에 그 일기장을 주문하는 것만 시간이 꽤 걸렸고 그렇게 8월 중순부터인가 일기를 쓰게 되었다. 하루에 채워야 할 일기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길게 쓰지 못해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래도 부담 없이 꾸준히 쓰기에는 딱 좋은 양이었다. 오늘도 이 글을 쓰기 전 어제 쓰지 못한 일기를 썼다.
아직은 초등학교 수준의 일기이다. 책을 쓴 작가처럼 마음에 훅 와닿는 글들은 많이 없다.
'오늘은'으로 시작하여 그저 본능적인 나의 감정(화가 났다거나 슬프다거나 밉다거나 등등)을 그날 있었던 사건들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괜찮다. 긴 일기를 아주 가끔 쓰는 것보다 매일 그날에 대한 꾸준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잠든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10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2033년이 지났을 때의 나의 일기장과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일기장도 나도 많이 낡아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탄탄해져 있겠지. 누가 아는가. 나도 10년 뒤 혜은 작가님처럼 책을 한 권 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