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에서의 휴일과 특별한 날들을 잊어버리고 살곤 한다. 특히 우린 주위에 한국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에 살다 보니 대부분의 날들이 한국의 달력이 아닌 인도 현지의 달력에 의지해 살아간다.
설날과 추석은 물론이고 때론 부모님 생신까지도 잊어버리고 지나갈 때가 있다.
스승의 날도 어린이날도 우리에겐 그저 같은 하루하루의 일상일 뿐이었다.
5월의 14번 째 날, 일요일. 바로 어머니날이었다. 인도는 미국을 따라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그래서 매 번 날짜가 달라진다.
그날도 다른 날과 변함없이 아이들을 깨워서 준비시키느라 정신없이 아침을 보냈다.
특히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작정하듯이 다투기 시작했다.
“형아! 이건 내거라고.”
“뭐? 이 거짓말쟁이! 이건 내꺼야. 처음에 살 때부터 내꺼 였거든?”
작은 자석 몇 개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는 이 두 꼬마들을 구경하던 나 또한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똑같아. 둘 다. 서로 좀 양보하면 안 되니?”
“아니요. 엄마. 형아가...” “아니요. 현민이가....”
큰애는 속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막내는 그 특유의 억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어. 이 자석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구나. 일주일동안 자석 사용 금지다.”
역시 남편이다. 이미 보드 게임 판 하나가 저 위쪽에 놓여 져 있었다. 저번 주 아이들이 싸워서 아빠가 올려놓았던 것인데 이번엔 자석이다.
아이들은 둘 다 울상을 지었지만 남편 덕분에 싸움이 끝났다.
그날은 학교에서 어머니날을 기념하는 순서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 자녀들이 모두 올라가서 노래를 불렀고 고등학생 몇 명도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나의 말썽꾸러기 두 꼬마 녀석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버이 날이네. 저 녀석들 엄마 화나게 나 하지 말아야지. 흥!’ 난 입을 삐죽거렸다.
이미 아침일 때문인지 아이들의 특창도 발표하는 글도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마지막 학교 선생님들 특히 어머니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영상이 틀어졌다. 학생들이 준비한 영상 같았다. 학교에서는 선생으로 집에서는 엄마로 일하는 그녀들의 해맑은 웃음들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울면 안 돼. 뭐 이런 것 가지고 창피하게.’ 난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이 나이에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것도 우스워 보였고 그러기엔 아침에 아이들에게 화내며 소리 지르던 그 모습이 너무 강하게 남았다. 순서가 다 끝날 때 쯤 긴 나무의자에 6명씩 앉아 있는 여학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핑크빛 인도 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고개 숙인 몇몇 아이들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하얀 두파타(인도식 스카프)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유치원 아이들부터 고등학생들까지(인도 기숙사는 유치원부터 기숙사 생활이 가능하다.)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들이 없었다.
‘아! 저 어린 꼬마 아이들이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고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엄마의 밥이 그리웠을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기억이 났다. 중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낼 때 얼마나 집이 그립고 엄마가 보고 싶었는지. 그러는 사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금도 전화 할 때 마다 힘든 것은 없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어린아이를 밖에 내놓으신 것처럼 걱정하시는 엄마 목소리가 생각났다. '아.... 엄마....'
순서가 다 마치고 음악에 맞춰 첫 줄에 앉은 아이들부터 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마다 눈물을 흘린 모습을 애써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때론 두파타로 얼굴을 가리며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아이들을 그 어느 때 보다 더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