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보면 재미있는 계약 이야기
우리의 일상에서 도장이 쓰이는 일은 참 많다. 우리는 계약서, 동의서, 통장에도 내 이름이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도장을 찍는다. 빨간 인주와 도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계약의 유래를 알아보다가 계약에 빠질 수 없는 도장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도장, 작지만 강한 것
도장은 본인임을 증명하고 서명과 동이랗게 사용되는 만큼 중요한 물건 중 하나이지만 도장이 언제부터 사용되어고 어떤 형태로 변해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많은 과정이 간소화, 자동화되고 디지털화 된 지금도 도장은 그 오랜 전통과 중요함을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아날로그 물건이다. 아날로그 물건이라고 할 것이 이제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인데 도장은 작지만 아주 강력한 물건임이 틀림없다.
최초의 도장
도장/인장은 인류 문명의 시작 때부터 인간에게 중요한 도구였다. 최초의 도장은 기원전 5000년경, 메소포타마에서 처음 출현했다. 점토판을 이용해 스탬프처럼 찍는 형태로 발명되었다. 사진을 보면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도장과는 많이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만들어졌던 원통형 도장은 소유권이나 지배 계급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 최초의 도장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장/인장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도 단군의 등장과 함께 한민족이 시작되었던 ‘고조선’시대였다. 이 때의 도장은 유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기록은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냈다” 는 ‘천부인삼방’이 우리나라 도장/인장의 최초 등장이었다. 천부인의 ‘인’이 바로 도장 인이라는 한자였던 것. 그리고 이후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우리나라에 도장 / 인장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훗날 고려-조선에 이르러 도장,인장 문화를 이룩해낼만큼 발전했다. 그 오랜 역사만큼 우리 조상들은 도장과 인장에 그 책임과 권위, 나아가 대표성과 상징성을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도장, 국새
우리 역사에서는 증보문헌비고에 기원전 2세기 고대 부여 예왕(穢王)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 우리역사 최초의 국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후 이 예왕지인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서기 19년 신라 남해차차웅 때,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을 발견하여 남해차차웅에게 바치자 차차웅이 인장을 매우 소중히 보관했다." 는 기록과 "서기21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동부여 원정길에 발견한 황금옥새와 북명 사람 " 에 관한 기록이 있다. 두 기록에서 신라는 왕권강화와 신라의 위상을 국새를 통해 다지려 했고, 고구려는 부여 원정의 정당성과 지배권을 국새를 통해 말하고자 했다는 국새의 가치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 시대, 도장의 기록과 유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인장에 대한 기록은 더 세분화되고 실질적인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의 경우 진고구려솔선한백장(晉高句麗率善韓佰長)이라는 관인 등 여러 점의 고구려 인장이 유몰로 남아있으며,신라는 문무왕 때 관인을 주조하고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 목인(木印), 석인(石印), 설봉산성에서는 봉인(封印)이 출토되었다. 백제는 이름과 간지(干支)를 새겨 찍은 인문이 남아있으며, 양각원인(陽刻圓印), 양각방인(陽刻方印, 음각방인(白文方印, 음각원인(陰刻圓印) 등이 존재한다고 한다.
고려시대, 도장이 문화가 되다
삼국시대까지는 도장,인장이 국새로서 상징성과 가치는 대단했지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부터 도장, 인장의 사용이 '문화' 라고 규정할 수 있을만큼 발전하고 대중화되었다. 인부랑(印符郞)이라는
국가 기관을 두고 국가의 인장(印章)만을 따로 관리 하는 벼슬이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나라의 인장(印章)이 관리 되었는데 관리된 도장은 지방으로 보내져 각종 문서에 사용되었다. 호적 등본을 내어줄 때, 노비를 비롯한 각종 재산 증명서와 수령(지방 관리)이 있는 마을로 보내는 보고서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공적 문서에 일일이 왕이 국새를 찍어줄 수 없기 때문에 따로 기관을 두고 관리한 것이었다. 또한 국내에서 사용하는 공문서에 찍는 관인(官印)을 사용한 시기도 고려시대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과거에 급제하면 합격증에 찍어줬던 나라의 인장이다.
재미있는 점은 고려시대에는 이 합격증을 사령을 시켜 합격자의 본가에 전하게 했는데, 이것은 고을에 대해 영예를 과시하도록 해 사람들로하여금 면학심을 북돋우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더불어 고려시대부터는 국가기관이나 왕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인장을 사용했는데 특히 자신을 상징하는 소장품으로 목전각 도장을 애용했다.
고려시대에는 도장, 인장 문화가 발달했고 이 문화는 금속공예, 활판인쇄까지 영향을 미쳤다. 과연 읽다보면 정말 재미있는 도장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도장은 누군가의 흔적이며 기록이다. 지금 우리가 옛 도장의 기록을 좇아 알아가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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