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다섯 살 된 너는 내복 위에 꽃분홍 망사치마를 입었다. 다소 애매한 패션은 손에 든 인형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헝클어진 긴 금발 머리 인형도 반짝이 머리띠에 분홍색 드레스다.
"옛날 옛날에 백설공주가 살았어요. 백설공주는 아주아주 예뻤어요."
그즈음 너는 '공주 비디오'에 빠져 있었다. 아침이면 할아버지에게 천 원을 받아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능숙하게 혼자 비디오를 켜고 눈 나빠진다는 할머니 잔소리에 세 엉덩이 후퇴, 두 엉덩이 전진을 반복하며 대여료 아깝지 않게여러 번 돌려봤다. 같은 나이 친구 딸은 영어 단어를 외운다는데 너는 비디오에 나오는 대사를 외웠다. 할머니는 그것조차 기특했는지 '쟈가 머리가 참 좋다'며 흐뭇해하셨다.
"그런데 백설공주 엄마가 병에 걸려 죽었어요. 공주님은 슬퍼서 엉엉 울었어요."
비디오가 끝나면 너는 옷장을 열어 방금 본 공주와 가장 비슷하게 차려입었다.그래봤자 내복 바지 위에 색색 치마를 껴입거나 반짝이 머리띠에 뾰로롱 요술봉을 드는 게 다이지만 너는 너만 아는 방법으로백설공주가 됐다인어공주로 변신했다.
"어느 날 왕자님이 파티를 열었어요. 공주님은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어요.
그때 요정이 나타났어요. 호박으로 마차를 만들었어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뻔하게 하나의 줄거리로 흐르지 않았다. 백설공주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빌려 신고인어공주는 사과를 먹고깊은 잠에빠졌다. 줄거리는 고속도로 메들리처럼 신기하게 이어지고 경계 없이들어맞았다.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편집했다. 나는 세상에서 네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이제 너는 스물세 살이됐다.
공주 비디오 대신 노트북과 핸드폰을 끼고 산다. 그 사이 공주도 변했다.겨울왕국 엘사는 모험을 떠나고갇혀있던라푼젤은 탑을 탈출했다. 쟈스민은 왕이 되어 스스로 법을 바꿨다.너는 더 이상 동화를 읽지 않고 내복 위에 치마를 껴입지 않는다.
이제 어리지 않은 네게 젊지 않은 나는 자주 시골 할머니의 마음이 된다. 잘 모르지만 파이팅! 말하지 않아도 네 맘 다 안다, 내 새끼.
인생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 오래전 그랬듯 너는 너만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 하는 고민은 도전을 위해 쓰이고힘겨움은 꿈과 조우할 것이다.인생의 선배로 여성으로 이십 년 넘게 만난 친구로 엄마로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 그러니까 언제든 오렴. 나는매 순간들을 준비가 되어 귀 기울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야기. 너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