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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0. 2023

이제 어리지 않은 너에게

백창우 <오렴>



"엄마 내가 얘기해줄까"


막 다섯 살 된 너는 내복 위에 꽃분홍 망사치마를 입었다. 다소 애매한 패션은 손에 든 인형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헝클어진 긴 금발 머리 인형도 반짝이 머리띠에 분홍색 드레스다.


"옛날 옛날에 백설공주가 살았어요.
백설공주는 아주아주 예뻤어요."


그즈음 너는 '공주 비디오'에 빠져 있었다. 아침이면 할아버지에게 천 원을 받아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 능숙하게 혼자 비디오를 켜고 눈 나빠진다는 할머니 잔소리에 세 엉덩이 후퇴, 두 엉덩이 전진을 반복하며 대여료 아깝지 않 여러 번 돌려봤다. 같은 나이 친구 딸은 영어 단어를 외운다는데 너는 비디오에 나오는 대사를 외웠다. 할머니는 그것조차 기특했는지 '쟈가 머리가  참 좋다'흐뭇해하셨다.


"그런데 백설공주 엄마가 병에 걸려 죽었어요.
공주님은 슬퍼서 엉엉 울었어요."


디오가 끝나면 을 열어 방금 본 공주와 가장 비슷하게 차려입었다. 그래봤자 내복 바지 위에 색색 치마를 껴입거나 반짝이 머리띠에 뾰로롱 요술봉을 드는 게 다지만 너는 너만 아는 방법 백설공주가 됐다 인어공주로 변신했다.


"어느 날 왕자님이 파티를 열었어요. 공주님은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어요. 

그때 요정이 나타났어요. 호박으로 마차를 만들었어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하게 하나의 줄거리로 흐르지 않았다. 백설공주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빌려 신고 어공주는 사과를 먹고 깊은  . 줄거리는 고속도로 메들리처럼 신기하게 이어지고 경계 없이 들어맞았다.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편집했다. 나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이제 너는 스물세 살이 됐다.



공주 비디오 대신 노트북과 핸드폰을 끼고 산다. 그 사이 공주도 변했다. 겨울왕국 엘사는 모험을 떠나고 갇혀있던 라푼젤은 탑을 출했다. 쟈스민은 왕이 되어 스스로 법을 바꿨다. 더 이상 동화를 읽지 않고 내복 위에 치마를 껴입지 않는다.



이제 어리지 않은 네게 젊지 않은 나는 자주 시골 할머니의 마음이 된다. 잘 모르지만 파이팅! 말하지 않아도 네 맘 다 안다, 내 새끼.



인생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 오래그랬듯 너는 너만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 하는 고민은 도전을 위해 쓰이고 힘겨움은 꿈과 조우할 것이다. 인생의 선배로 여성으로 이십 년 넘게 만난 친구로 엄마로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 그러니까 언제든 오렴. 나는 매 순간 들을 준비가 되어 귀 기울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야기. 너를 응원한다.







사는 일에 지쳐 자꾸

세상이 싫어질 때

모든 일 다 제쳐두고

내게 오렴



눈물이 많아지고

가슴이 추워질 때

그저 빈 몸으로 아무 때나

내게 오렴



네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방 하나 마련해 놓고

널 위해 만든 노래들을 들려줄게



네가 일어날 때

아침이 시작되고

네가 누울 때

밤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너를 찾으렴



망가져가는 너의 꿈을

다시 빛나게 하렴





ㅡ 백창우,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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