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이던 봄,우리는 음악실에서수업을 듣고 있었다.음악 선생님의 별명은 안소니였다.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의 남자 주인공 이름을 딴 것이었는데 안소니선생님은 만화 속 주인공처럼 조금 긴 곱슬머리에피부가 하얬다. 35년 전이니 흔한 남자의외모는 아니었다. 안소니선생님을 사모하는 친구와 선배가 많았다.
그날은 음악 이론을 공부 중이었다. 선생님께서 판서를 하시면칠판을 보며 공책에 베껴 적었다.어느덧온화해진 날씨에 음악실 창문은 전부 열려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필기하고 때때로 창밖을 흘깃거리고 안소니 선생님의하얀 손가락을 몰래 훔쳐봤다.
판서가 칠판의 반을 넘었을 때문득 선생님의 손이 멈췄다. 칠판에 분필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머리를 들었다. 선생님은 칠판을 향해 서 계셨다. 선 채로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 보셨다. 선생님을 따라 우리도 창밖으로 고개를향했다.'창밖은 오월'이었다.
작은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은 손을 들어 칠판에 큰 엑스자를 그렸다. 무엇이 잘못 됐단 걸까 고민할 틈 없이 돌아선 선생님 얼굴엔 웃음이 펴 있었다.이심전심 퀴즈 풀이하듯 우리도 따라 웃었다.
'푸른 바다 건너서 봄이 봄이 와요 제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선생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봄 노래가 또 뭐가 있더라" 봄 싹처럼 여기저기서 답이 나왔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봄봄봄봄봄이 왔어요 우리들 마음속에도'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봄노래로 거나해진 우리는 야외수업을 하자는 선생님 말씀에음악책 한 권 옆에 끼고 쪼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수업은 이미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다른 반 수업 중이니 조용해야 한다는 선생님당부에고개 숙여 킥킥대며복도를 지났다.
초록이 그늘진 층층 돌계단에 앉았다. 선생님은 커다란 카세트테이프스테레오로 가곡을 들려주셨다.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분명히봄노래였으리라. 노래가 끝나자 말씀하셨다. "이제 조용히 봄의 소리를 들어보자."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전지적 시점이 된다. 나에게서 나와 청명한하늘구름 위에 걸터앉는다.그곳에서 나와 친구들을 내려본다. 여린 초록이 물든 교정. 돌계단에 아무렇게 앉아있지만 별자리 같은 아이들,선생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코를 킁킁대는 우리는 모두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얼굴이다. '선생님 암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짓궂은 농담에 입을 가리고 배를 쥐고 깔깔거리던 웃음. 핀잔하듯 흘기지만 웃음 어린 선생님의 눈길.5월이었다.
나는 낭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지만 낭만이 무엇인가묻는다면 그날을 떠올릴 것이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창밖은 오월인데'박은 고개를 들고 분필을 집어던지고 옆구리에 책 한 권 끼고나가초록에 기대어 기어코 오월의 햇살을 맞는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가만히 응시하는 것.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낭만 아닐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