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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8. 2023

버려질 화석



황정은의 일기를 읽다 작약 다섯 송이를 사 왔다. 줄기 끝을 비스듬히 자르고 열탕 처리하여 병에 꽂았다. 봄이 되면 작약을 사곤 했는데 올봄엔 잊고 있었다. 아마도 내 개와 산보를 많이 다녀서인 것 같다. 올봄엔 산과 들에 핀 온갖 꽃을 많이 보았다.


단단한 봉오리 풀내가 난다. 아직은 꽃 아닌 풀. 꽃이 될 풀. 하루하루 봉오리가 벌어지는 것을 자세히 살다. 조금씩 열리는 꽃잎. 전히 침묵하는 꽃잎. 그 안에 감춰진 것들과 열릴 역사를 상상한다. 그리고 일기》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이란 말을 오래 생각했다. 






1900년대를 30년 살았다. 내가 태어나기 몇 달 전 전태일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분신 자살했다. 내가 태어난 해엔 <민주수호 선언>이 발표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전역에 위수령이 선포됐다. 학생들은 연행되어 강제 징집 당하고 언론인은 해고 됐다. 아마 내 안엔 기억하지 못하는 싸이렌 소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9살 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

민주화의 꿈은  해 12.12 군사반란으로 배신당했다.
어른들 빨갱이가 다시 쳐들어 왔다 겁을 내고 골목엔 다니는 사람 하나 없 스산했다.

멀리 떨어진 광주에선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 내 나이 10살이었다.



13살 소련 칼기 폭파 사건 269명 전원 사망.

16살 서울 아시안 게임
17살 박종철 고문치사, 6.10  민주 항쟁, 이한열 열사의 죽음. 핏값으로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18살 88 서울 올림픽 개
19살 베를린 장벽 붕괴

21살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을 때 어미는 나를 잉태 밀레니엄을 코 앞에 둔 어느 날 나는 딸을 낳았다. 학 졸업하며 삐삐를 살까 고민했는데 이듬해 결혼하고 나니 핸드폰이 나왔다. 아들 낳고 시작된 IMF는 딸을 낳고 끝났다. 둘째 돌 때 산 컴퓨터화선을 연결해 천리안으로 접속했는데 몇 달 후 www. 가패스 인터넷이 깔렸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우리 육체 안에는 머나먼 과거 존재들의 조악함이 남아 있고, 누대에 걸쳐 무수한 생물체가 구름처럼 불규칙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세계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 12쪽)





개인의 역사가 시대의 화석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하찮은 화석인지. 의미 없는 뼈 조각, 뒤적거려질수록 보잘것없는 증거, 별 볼 일 없는 기억. 시대를 살았으나 시대를 담지 못한 정신. 앞서서 나간 자를 따르지 못한 부채감. 알지 못하는 것들. 임승차의 부끄러움, 깨닫지 못하고 묻지 못한 일들. 나는 증명할 것 없는 화석, 버려질 화석이.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 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황정은, 일기 76쪽)




2023년.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질문하고 기록할 것인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에게 한 학생이 "문명의 첫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마거릿 미드는 1만 5,000년 전 인간의 넓적다리뼈라고 답했다. 미드가 증거라고 말한 1만 5,000년 전 한 인간의 넓적다리뼈에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넓적다리뼈가 다시 붙으려면 최소 6주간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람은 굶어 죽지 않았다. 뼈가 붙고 뼈가 붙은 이후 죽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이 사람을 최소한 6주 동안 돌보았다는 의미다.



뼈가 부러진 이를 돌본 자에게 '당신이 문명의 증거입니다'라고 알려 준다면 먼지가 되어 날아간 그는 뭐라고 할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할까. 놀라 수줍어할까.
상처받은 화석 의미 있. 모든 불행에 손 내밀 순 없지만  최소한 목도한 누군가의 불행, 상처를 모른 체하지 을 때 우리는 함께 증거가 된다.








작약 송이가 활짝 피었다. 매년 다섯 송이 중 두세 송이만 꽃을 피운다. 피지 않은 봉오리는 희망일까 포기일까. 이만하면 충분인가 아닌.



작약은 꽃의 여왕이란 칭호답게 꽃송이가 크고 화려하며 향이 진하다. 작약은 숙근초. 숙근초는 가을에 모든 줄기와 풀을 말린 후 땅 속에서 봄을 준비한다. 스스로 월동에 들어가 때를 기다리는 꽃. 죽은 듯 숨어 있다 피는 꽃.



겨울에 작약이 심긴 화분을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 안에 꽃순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춥게 지낼수록 뿌리와 순이 더 건강해 다음 봄 향 진한 꽃을 피운다.

정약용은 자신이 꾸민 정원을 소개한 <죽란화목기>에서 작약을 중요한 안뜰식물로 꼽았다. 노지에서도 잘 자라고 그늘 진 곳에서도 잘 자란다. 작약의 뿌리는 약재로 사용되는데 진통에 효과가 있다. 꽃말은 '수줍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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