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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02. 2023

갈래길



흑백의 기억에 컬러가 입혀지는 건 일곱 살 무렵이다. 나는 여러 개의 종이상자와 색색의 보따리 사이에서 잠을 깼다. 이삿날이었다. 아빠는 제부터 우리가 증조할아버지와 같이 살 거라 말씀하셨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구천동에 가서 증조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트럭에 싣지 못한 옷 보따리 몇 개와 함께 아빠가 운전하는 노란색 마이크로버스에 올라탔다.


마포에서 출발한 버스가 한참 달렸다. 느 순간 포장 도로에 들어섰는지 돌멩이에 바퀴가 부딪치며 버스가 뒤뚱거렸다.   온통 나무뿐이었고 버스에서 내리니 사방이 너무 조용해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같았다. 잠시 후 담장 한쪽 끝이 열리더니 안에서 여러 명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좀 전의 적막도 싫었지만 모르는 어른들이 '네가 걔구나' 하며 알은 체하는 것은 더 싫었다. 동네라기엔 작은 곳엔 모두 아홉 가구가 살고 있었다. 구천동 산 23-1번지. 우리는 열 번째 가구가 됐다.


증조할아버지는 채 마루에 서 계셨다. 옥빛 한복에 자줏빛 조끼를 입고 간난이 단발머리를 한 나를 내려다보셨다. 사 잘하라던 엄마의 당부를 잊고 나는 엄마 뒤로 자꾸 숨었다. 아빠와 엄마는  내려 정리해야 하고 인사할 사람도 많다. 장손이 이사 들어오는 날이라고 사촌, 육촌까지 찾아와 분위기가 잔칫날 같았다. 어색했던 나는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내 뒤엔 나만 따라다니는 동생이 달라붙어 있었다. 마는 우리가 성가셨는지 오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과자를 사 먹고 오라 하셨다.


 "아까 차 타고 들어온 길 기억나지? 여긴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따라가면 돼. 큰길 나오기 전에 슈퍼 있어. 동생 데리고 갔다 와."


마포에서 아빠는 버스 운전을 하셨다. 나는 아빠가 모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타고 다녔다. 엄마 말로는 정류장 이름을 다 외워 꼬마 안내양 소리를 들었다 한다. 계산도 잘해 두부, 콩나물 심부름도 동네 언니들 따라 제법 먼 데까지 놀러 다녔다.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지만 보통 첫째 아이에게 갖는 부모의 기대와 대우가 그렇듯 엄마는 나를 다 큰 아이 취급하고 실제보다 과하게 똑똑 여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사 온 첫날 선뜻 길을 나선 걸 보면 아침부터 시작된 이사가 어지간히 지겨웠던 모양이다. 마포 일대를 돌아다닌 인생 7년 경험을 자만했을 수도 있고 거금 오백 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명절에 세배 정도는 해야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구경할 수 있었다. 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 못하고 없던 용기가 생긴 건지 나는 동생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겁은 좀 났지만 나는 나대로 수가 있다. 이미 '헨젤과 그레텔'을 읽은 뒤 길에 빵부스러기 따위를 떨어뜨리는 한심한 행동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라질 염려가 없는 표식을 찾고 어가며 보이는 것을 외웠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간첩신고는 113'  길에 세워진 녹슨 초록색 철판 표어를 따라 읽 무엇을 지키기 위해 쳐놓은 건지 알 수 없는 뾰족한 철조망과 쓰레기가 버려진 작은 도랑, 이상한 모양의 나무도 기억했다.


엄마 말대로 길은 외길이었다. 집이 점점 멀어지고 길에는 돌멩이가 많아졌다. 양쪽으로 펼쳐진 논과 밭을 지나 오솔길이 나오고 조금 더 걸으니 슈퍼에 도착했다. 과자를 사고 잔돈을 주머니에 넣 동생 손을 고쳐 잡 뒤 방향을 바꿔 좀 전까지 등 뒤로 멀어졌던 풍경을 앞으로 하고 걸었다. 외웠던 표어 차례를 지켜 거꾸로 나오고 아까 봤던 철조망과 도랑이 보였다. 이대로 가면 집에 도착할 것이고 엄마에게 칭찬받을 게 확실했다


문제는 곧 발생했다. 기억과 완벽하게 들어맞던 길이 느 순간부터 이상해졌다. 오솔길을 벗어나자 갑자기 눈앞에 두 개의 길이 나타났다. 올 때는 하나인 길이 둘이 된 것도 놀라웠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두 길 모두 처음 본 길이었다. 슈퍼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 누군가 있던 길을 지우고 새로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분명 여기까지는 확실히 아는 길인데 한 발짝 앞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곳은 세 개의 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오른쪽 높은 길은 '구석말'이란 동네로 가는 길이고 왼쪽 아래는 '밤나무골' 는 길이었다.  가려면 가운 길가야 하는데 세 개의 길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그곳서 만나 층을 두고 갈라졌다. 집에서 나올 땐 길이 하나지만 돌아갈 땐 아니란 사실을 그땐 엄마도 나도 몰랐다.


가운데 길은 언덕을 다져 만든 내리막 길이었다. 세 길 중 가장 좁아 어른 한 명이 지나가기에 맞는 폭이었다.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틀 전 내린 비로 풀이 높이 자라 라갈 땐 길이 보이지만 위에서 내려보면 풀에 가려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새들이 빵조각을 다 먹어버린 걸 알게 된 헨젤의 심정이 됐. 도대체 길 어디로 간 걸까.


여러 번 슈퍼와 갈래길이 만나는 곳을 왕복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머릿속 길은 이어지지 않가야 할 길이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갔다 다시 갈래길로 돌아왔다. 눈 앞에 펼쳐진 언덕 사이에 길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집에서는 이미 난리가 났미아 방송을 하고 그래도 찾지 못해 경찰서에 신고했다. 아빠와 엄마, 동네 사람들까지 가세해 찾았지만 우린 발견되지 않았다. 짧은 가을 해가 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어두워졌다. 산의 밤은 이전에 봤던 어떤 밤보다 어두웠다. 길을 찾는 동안 울지 않은 것은 내가 울면 동생이 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저녁이 내려오는 먼 산을 바라보며 나는 결국 포기했다.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는 동생의 손을 잡고 갈래길에 있는 나무 아래 쪼그리고 기대앉았다. 거기가 내가 아는 집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산에서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주위는 온통 깜깜한데 어둠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이 할아버지 집일까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저기까지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깜한 길 저 쪽에서 아주 작은 불빛이 흔들거리며 다가왔다. 빛의 정체가 자전거 야광등인 알았을 때 벌떡 일어나 온 힘을 다해 자전거를 향해 뛰었다. 멈춰 선 자전거를 앞에 두고 집을 잃었다 했는지 길 없어졌다 했는지 엄마보고 싶다 했는지 모르겠. 어차피 셋 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제야 울음 터뜨렸다.


자전거 주인은 신문 배달 소년이었다. 소년은 우는 나를 달래주지도 않고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깜깜한 밤을 배경으로 서서 내 말 끝나 기다리더니 마지막 집 신문 배달을 다녀와 집을 찾아 주겠다고 말했다. 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이대로 잡고 매달려야 할지 망설였다.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면 안 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사정을 제대로 전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왠지 이전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소년의 뒤통수를 믿는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는 더욱 그. 시간이 흐르고 어디선가 여러 명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불빛이 점점이 보이고 그것이 플래시 빛이라는 걸 알아볼 때쯤 엄마아직 누군지 알지 못하는 동네 사람 여럿이 동시에 나타났다.


일순간 낮인 듯 모두의 얼굴이 선명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무슨 이유인지 내 이름 같지 않았다. 엄마가 뛰어나를 안았을 때 나는 그제야 엄마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신문배달 간 곳은 증조할아버지 집이었다.


살면서 종종 갈래 길로 소환곤 했다. 는 것이 막막하고 버거울 때면 같은 꿈을 꿨다. 어떤 날은 낮이 때론 밤이 바람이 불 불지 않 꽃이 피 낙엽이 떨어졌지만 서 있는 곳은 언제나 갈래길이었다. 언덕에서 내려보면 낯선 두 개의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 나는 다시 일곱 살이 되 동시에 지켜보는 누군가가 다. 눈 앞의 길은 내가 아는 길이 아니고 찾던 길이 사라진 막막함이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인생길을 헤때 어릴 적 길을 잃어봤다는 사실이 묘하게도 위안이 됐다. '보이지 않지만 길은 있다'는 말 무슨 뜻인지 경험으로 알았 용기를 내어 열 발자국만 걸어가면 가려진 나타날 거 말은 비유가 아닌 묘사였다. 떤 날은 용기내고 어느 날엔 그렇게 하지 못했그렇지 못한 날 그만 애쓰자 하며 나를 앉혀 주었다. 확신했으나 긋날 수 있고 멈춰야 할 순간이 오기도 다리는 일은  분명히 작은 불빛 하나가 나타날 거라 희망했다. 구조되리라 믿었다.


다음 날 어른들은 내가 래길에서 길을 잃은 이유를 다. 엄마는 다른 데로 가지 않고 갈래길에서 기다린 걸 칭찬하셨다. 나는 실패했지만 괜찮았다. 그 후로도 비가 오 때를 잊으면 다시  자라 길을 지만 길을 잃어봤나는 다시는 길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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