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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Oct 18. 2023

108 계단을 오르며



주차장은 두 군데였다. 입구와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캐리어를 끌고 으로 들어섰다. 30도가 웃도는 7월 마지막 주말, 달마산 풍광은 여름 볕을 잔뜩 받아 나무마다 잎이 무성하고 울창했다. 미황사를 품은 산은 기보다 우람하고 단단해 보였다. 달마산은 돌산이고 나중에 들었지만 우리가 오기 그제까지 일주일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물을 잔뜩 먹은 산은 더 부풀어 보였을 것이다. 


숲의 정취에 빠진 것도 잠시, 현판이 걸린 큰  지나 눈앞에 오르막 길이 등장했다. 108 계단이 그 위로 이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108 계단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미황사에 오기로 하고 구만 믿고 있다 한 번 떤 곳인가 검색을 거기서 대웅전 천일 공사 소식을 접하고 108 계단이 아름답다는 얘길 읽은 기억이 났다.  


어쩐지 사진으로 본 사찰은 산 중턱에서 꼭대기에 가까웠는데 도착하니 산 입구 같아 이상하다 싶었다. 미황사 108 계단은 산과 어우러져 등산하듯 간격을 두고 이어다. 산 입구에서 절이 있는 산 중턱까지 계단과 오르막이 반복되는데 산세가 아름다워 마음을 환기시키기에 당하다. 시작점에 적힌데로 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비우다 보면 어느새 미황사 앞마당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 출발 장소에 만났을 때 친구가 내'가방이 왜 이리 크냐' 물었다. 기내용 캐리어라 크단 생각을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두 친구는 등산배낭을 메고 왔다. 여행 갈 땐 당연히 캐리어를 들고 야한다 생각것이 첫 번째 였고 작은 가방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수건 때문이었다. 절에 전화를 넣어 비품을 확인했 정수기 없수건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이박삼일 일정에 하루는 달마고도 하루는 도솔암에 오를 예정이었다. 못해도 샤워를 하루 두 번 이상 할 텐데 건이 최소 여섯 장은 필요하겠다 계산했다. 그것도 최대한 줄여 잡은 것이랬더니 친구가 깔깔 웃으며 자 두 장만 갖고 왔다고 다. 친구는 배낭 메고 혼자서 국내는 물론 외까지 여행 경험이 많았때문에 력에 눌려 라 말은 못하고 그냥 나 혼자 '래도 두 장은 너무 적지 않나'중얼거렸다.


그리하여 내 수건이 여섯 장 들어간 캐리어 함께 108 계단이 펼쳐졌다. 별 수 없이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 108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건 말고는 옷가지 몇 벌이 다라 그렇게 무겁지 않을 줄 알았는데 캐리어 자체 무게가 꽤 되는지 묵직했다. 배낭을 멘 친구 둘은 커다란 쇼핑백에 물과 욕용품  같이 사용할 물건이 든 가방을 양쪽으로 나눠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공양간에 끓인 물이 있지하수라 그냥 마셔도 무관했는데 물이라면 그저 정수기 생각했다.


처음에 그럭저럭 들만했는데 완만하던 경사가 급해지 캐리어를 가슴 높이까지 려야 했다. 얼마 오르기도 전에 힘 부치기 시작했다. 한 여름이라 30도 웃돌아 바깥에 서 있는 것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더웠는데 무거운 가방 들고 등산을 하려니 이런 게 극기체험이고 고행이구나 다.


캐리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다. 5분이 지났는지 10분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온몸이 땀에 젖 팔 뿐 아니라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기껏해야 제 반쯤 을까 싶은데 더는 못 가겠다 싶을 만큼 힘이 들다. 저만 앞서가던 친구가 돌아보더니 괜찮냐며 도와줄까 물었지만 저도 어깨와 손에 짐을 잔뜩 든 처지로 산을 오르는 중인 데다 가방은 모양부터 나눠 지기에 애매 물건이었다. 괜찮다 하고 혼자 뒤로 처져 가는데 어찌나 힘든지 들고 있는 가방을 내 버리고 싶은 욕구가 불쑥거렸다. 


미황사 로 아래엔 전통 찻집이 하나 있 찻집 마당을 지나면 108 계단 마지막 구간에 이른다. 단을 올라 찻집에 도착했을 마당 평지라 반가워 얼른 캐리어부터 내려놓았다. 마당돌이 많아선지 가방을 끌고 가는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주위가 고요하고 산 속이라 끌리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고 기괴하게 들렸다. 캐리어 바퀴 소리는 세상의 소리였고 그곳 어울리지  느껴졌다. 경박하고 거친 음이 내 마음과 같다.


그때 마침 위쪽 계단에서 내려오시는 스님과 마당 중간쯤에서 마주쳤다. 스님우릴 보고 합장하시는데 그때 나를 보시는 표정이 오묘하셨다. 나는 나대로 이렇게 해석했다. 저 사람은 이곳에 오면서 거운 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커다란 가방을 들고 108 계단을 오르는 일이 부끄럽고 일종의 형벌처럼 느껴졌다. 황사 앞마당에 닿는 마지막 높은 경사의 계단을 올랐을 땐 숨이 차고 멀미가 나듯 속이 울렁거렸다. 달리기를 하고 난 후와 같이 심장이 괴롭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구가  찮냐고 물었 나는 대답조차 힘들어하지 못하고 가방부터 내팽개쳤다. 꼴도 보기 싫 가방 버려두고 앉을자리부터 찾았다. 안내해 주는 종무소 사람이 읍내에 볼 일을 보러 가 자리에 없길래 뒤쪽으로 늘을 찾아 처마 아래 앉았다. 너무 힘들어 처음 와 보는 절인데도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후회부터 했다. 여름 산 오려고 했던 것부터 못한 일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지친 채로 그늘에 한참 앉아 있다 보니 산에서 바람이 내려와 주위를 도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은 살아있어 적막한 중에도 움직이고 닿고 나를 가라앉혀 주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절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주위를 돌며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개는 유순했는데 '인간아, 그 무거운 것을 지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냐'라고 놀리듯 웃는 표정을 지었다. 더운 여름 털 옷까지 입은 주제에 나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히고 심장을 진정시키고 보니 그제야 경건하고 아담한 전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주저앉아 생각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걸까. 이번 여름휴가는 고요하게 보내고 익숙한 풍경에서 나를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친구가 절에 가자고 했을 때 이곳이  낯설어 좋았다. 그렇게 떠나놓고 짐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들로 채워왔다. 수건 몇 장 옷 몇 벌 없는 며칠이 불안하고 불편할까 봐 떠나면서도 싸매고 들고 다.


내가 받은 고통은 가방 때문이 아니라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떠나자 하면서 수건이나 걱정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던 데로 하고 생각하던 데로 생각하며 무엇이 바뀌길 기대한 걸까. 어쩌면 방금 전 들고 온 무거운 가방은 내가 짊어진 세상의 무게일지 모른단 생각 들었다. 떠나기만 한다고 떠나지는 것이 아니었다. 떠난다는 것은 나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차장 안쪽 끝에 경내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절에서 묵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길로 차를 올려 절까지 들어다. 금 덜 걸을 요량으로 문과 가깝게 주차를 한 터라 미처 못 봤던 것이다. 그때 계단에서 마주 스님께서는 차를 타고 올라오면 되는데  걸어 올라오나 싶어 그런 표정을 지으셨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 그걸 몰랐네 행과 웃다 음을 쳤다. 내가 먼 해남까지 온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내가 얼마나 불필요한 세상의 짐에 시달리고 있는지 108 계단은 알려 주었다. 처해서 지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실감하게 해 줬다. 중간 어디 앉아 쉬어 오거나 버려두고 나중에 찾아와도 될 것을 융통성 없이 군 답답한 내 성정 역시 돌아보게 했다. 캐리어를 들고 108 계단을 오른 것이 이곳에서 치른 첫 번째 수행인 셈이다. 움켜쥐고 놓지 못하 려하는 것이 사실은 다 부질없다는 걸 고생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박삼일을 묵고 절에서 나올 때는 미리 숙소 옆에 올려둔 차를 타고 내려왔다. 가방을 들고 을 뻘뻘 흘리며 108 계단을 기어오르던 이틀 전  떠올랐다. 가방 안 쓰지 않은 수건이 한 장 있었고 친구는 두 장으로 이박삼일을 보냈다. 미황사 개 아미가 올 때처럼 갈 때도 지켜다. 그늘에 누워 쳐다보는 무심한 눈길에 웃으며 인사했다. 짐의 무게에 짓눌리며 힘들게 라온 길을 갈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이후로 두번 더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는 충분히 즐기며 올랐다. 미황사는 108 계단도 아름다워 즐길만하다.


가방이 어찌나 꼴보기 싫던지 올라오자마자 냅다 버려 두었다.


미황사 개 아미다.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반겨주었는데 속으로 내 꼴을 비웃었을지 모른다. 인간 뭘 그렇게 이고지고 다니나 하면서.


종무소 전각 뒷편 처마 아래에서 30분 넘게 기다렸다. 한여름 바깥에 일없이 나와 서있던 적이 있었나 낯설었다. 위쪽 산에서 바람이 내려온다. 그늘에서 바람을 맞으면 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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