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중학교 3학년 국어시간이었는데 우리는 한 사람씩 일어나 소감 말하기를 하였다. 교과서에 실린 <소나기>를 읽은 후였다. 소나기는 황순원의 단편소설로 1952년 《신문학지》에 처음 발표되어 1960년부터 현재까지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고 있는 작품이다.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된 탓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80년대 국어수업은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다. 교과서에 나온 작품 역시 감상보다는 시험공부 위주였다. 문장이나 단어 아래 줄을 그어 작가의 뜻을 해석하고 동의어 반대말 품사 등을 기록하며 시험에 나올법한 내용만 공부하였다. 시도 소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과서를 읽고 감상을 말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그날은 어쩐지 특별했다.
한 반에 학생이 50명이 넘을 때였으니 한 명씩 일어나 말을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렸을 것이다.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때 우리는 대부분 부끄럼쟁이들이어서 글을 읽고 감상을 말하라니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전부 머뭇거렸다. 지금이라면 그런 일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땐 그것조차 시험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럴 땐 모나지 않고 평범한 답이 제격이라 대부분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소녀가 죽어 불쌍했습니다.' 하는 정도로만 한 마디씩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친구들의 감상을 들으며 차례를 기다리며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골똘했다. 교과서에서 처음 소나기를 읽을 때부터 어쩐지 가슴이 울렁대고 저릿거렸다.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감성이 소설을 통과했다. 사랑이라기엔 풋풋하고 우정이라기엔 설레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밑줄 그어가며 공부하는 건 어쩐지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징검다리에서 소녀가 "이 바보" 하며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질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들판의 꽃을 꺾어주던 소년의 낭만과 소나기를 피해 수숫단을 세워준 소년의 듬직한 등을 떠올렸다. 겉옷을 벗어 덮어주고 좁은 수숫단 속에 같이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그때의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기고 잔망스럽게 소녀가 얼룩진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죽었을 때 약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소녀는 어디가 얼마나 아팠던 걸까. 자려고 누워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소년의 얼룩을 평생 지워지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도리없이 친구들과 똑같이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합니다.'라고만 말하려 했다. 그런 맘으로 일어섰는데 입을 연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우는 나와 당황스러운 내가 분리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우는 나는 제어되지 않아 엉엉 울었다. 교실은 조용했고 나만 서서 울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모두 친구의 눈물을 부러워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울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저 눈물을 기억해야 한다.' 선생님 말씀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생님 덕분에 부끄러웠던 마음을 위로받고 어쩐지 울고도 칭찬받은 기분이 됐다. 어떤 감상은 말로 하지 않아도 되고 말로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날 배웠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해진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릴 적과 같을 수 없고 오십이 넘어 열다섯처럼 살 순 없지만 그때 내 마음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글을 왜 쓰는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더듬어 보면 나는 언제나 잊고 말아 아쉬운 지점으로 가 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일상 속 작게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스쳐버리면 잊고 말 것들. 잊고 말아 아쉬운 것들, 지금은 더 이상 내게 없어 섭섭한 마음들,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데 잊고 말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기억하고 적고 싶었다.
라틴어에서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한다.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 역시 망각을 뜻하는 '레테이아' 앞에 부정어 'a'가 붙은 말이다. 진실이란 잊을 수 없는 것 또는 잊혀선 안 되는 무엇이란 의미일까.
글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내게 있어 진정성이란 잊을 수 없는, 잊혀선 안 되는, 잊어서 아쉬운 것들인가 보다. 오랫동안 소나기의 눈물을 잊고 살았다. 아름다운 일이라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나이 들어 보니 알겠다. 소환하고 복기하는 사이 작은 틈에 불꽃이 오른다. 그때와 다른 온도와 모양일지라도 한 번씩 떠오르며 원형이 지닌 다정함이 기억나는 걸 보면 아마 그것이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살아있어 연약하게 마음을 지피고 영혼의 원기가 되어 간혹 세상에 휘둘려 꺼질지 모를 나를, 나의 무언가를 끈질기게 지켜내는 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