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멈췄다.
"내가 고아로 살다가 군대를 갔는데 누구 하나 면회 올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외로웠어. 그런데 어느 날 한 여고생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한 거야. 국군장병 아저씨께, 로 시작하는 편지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지. 2년 반 넘게 그 편지에 의지해서 살았던 것 같으니까. 사진만 한 번 주고받고 만나지는 못했어. 만나지도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그 여고생이 생각날 때가 있었어."
-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고등학생 때 위문편지를 썼다. 숙제였으니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해 뻔한 내용으로 채웠을 것이다. 그때 쓴 위문편지는 단체문자보다도 기대가 없어 답을 기다리지도 받지도 못했는데 학교로 답장이 왔다. 교무실로 나를 부른 선생님은 편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군인이랑 펜팔 할 시간이 어딨어. 그럴 시간 있음 공부해."
숙제로 쓴 흔하고 성의 없는 편지에 정성을 다해 보내준 답장.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느낌은 남아 있어 대체로 명랑하고 고맙다는 말과 답장을 기다려도 되겠냐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아저씨도 나처럼 숙제로 편지를 쓴 건 지 그래서 답장하면 지금 나처럼 당황스러울지 궁금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인상 깊었던 글은 <한겨레> 김종엽 교수의 칼럼이었다. 투표하러 갈 시간조차 없이 쫓기며 사는 이들이 투표할 수 있게 집단적 노력을 기울이자는 글이었다. 특별했던 이유는 구체성에 있다. 택배 기사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선거일 이후로 온라인 구매를 미루자 제안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택배를 받으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무릎을 쳤다. 타인의 노동상황을 상상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글이었다. 2020년 택배 없는 날이 지정된 데에는 이런 제안과 상상력이 초석이 됐을 것이다.
내가 한 큰 실수 하나를 고백하자면 몇 년 전 온라인 모임 단체 카톡방에 '주말 푹 쉬시고 즐겁게 보내세요.' 인사하며 깜찍한 이모티콘을 올렸다. 몇몇 비슷한 답장들 사이로 누군가 "저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 하지만ㅠㅠ "이라고 적었다. 순간 부끄러웠다. 물론 일하면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지만 그날 보낸 대화와 이모티콘 속엔 주말엔 일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나조차 토요일에 일하지 않은지 몇 년 되지 않고 주말과 휴일에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 없이 말했다.
배달이 밀려 투표하지 못하고 주말에 일하는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할 때 주문한 물건 하나,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악의 없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악의가 없다고 아프지 않겠는가. 모든 폭력은 의도와 상관없이 나쁘다. 공감과 배려는 선한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고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란 복거일의 말은 정곡이다.
나는 30년도 더 지난 위문편지 속 국군 장병 아저씨를 이제와 상상한다. 책을 읽고 그 아저씨가 외로운 사람이었으면 어쩌나 미안했다. 책 속 남자는 30년이 지나 드문드문 떠올리던 여고생에게 편지를 썼다. 예전 주소로 기대 없이 보낸 편지가 두 사람을 다시 연결시켜 몇 년 뒤 둘은 결혼했다.
소설 같은 결말을 읽으며 친절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다짐한다. 작은 선행이 누군가를 살린다는 사실을 또 배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에만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선한 상상력을 학습하고 노력할 때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 안에서 목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