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결핍

문태준 '바닥'

by 밤이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득후두득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ㅡ문태준 / 바닥 (시집 가재미)









비가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다 모자 깊게 눌러쓰고 집 앞 카페에 간다. 차를 주문하고 좁은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몇 번의 경험으로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지만 신중을 기한다. 자리에 앉자 후두둑 후두둑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아, 빗소리다.


38층에 산다. 풍수로는 땅기운이 미치는 8층 이하가 좋다는데 어디 이것저것 따지며 살 수 있는 세상이던가. 어지럽지 않냐, 흔들리지 않냐, 엘리베이터 고장 나면 어떡하냐 묻는데 살아보니 정작 땅과 멀어 곤란한 건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엔 비가 오면 빗소리는 당연한 줄 알았다. 비와 빗소리는 같은 의미였다. 비가 소리 내며 내릴 리 없는데 '바닥이 받아줘야, 가랑잎이 스쳐야' 빗소리 들리는 간단한 이치를 전엔 미처 몰랐다.


끔 빗소리가 들린다. 바람을 타고 벽과 유리로 질주하는 폭주족 비. 가속페달 밟은 오토바이 소리를 낸다. 힘차게 바닥을 차고 이뛰기하듯 라와 소리를 전하는 장대비 있다. 힘 좋은 활어처럼 팔딱대는 비가 내릴 땐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우리 집은 빗소리가 안 들려" 하자 누구는 그게 왜 하고 누구는 나이가 몇인데 빗소리 타령이냐 타박했다. 진지하게 물었다. 몇 년간 빗소리를 듣지 못해 봤냐고. 개그 유행어를 덧붙였다. 안 해 봤으면 말을 말길.


빼앗기면 안다. 음소거된 먼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당연하게 여겼던 사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유전자 속에 각인된 오래된 순리. '스쳐서 생겨나는'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나야 들리는 그리움이 절실해진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털며 한 사람이 들어온다. 체온을 재고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손잡고 껴안으며 온으로 사랑을 전하던 일은 옛일이 되었다. 스치는 것이 불안하고 만나는 것이 금지된 세상.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을 빗소리로 덮는다.


3500원을 소비하며 듣는 빗소리. 커피는 빗소리 사은품인가. 스치지 않고 만지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 받아 주어 생겨나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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