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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16. 2021

빗소리 결핍

문태준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득후두득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ㅡ문태준 / 바닥 (시집 가재미)









 비가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다 모자 깊게 눌러쓰고 집 앞 카페에 간다. 차를 주문하고  좁은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몇 번의 경험으로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지만 신중을 기한다. 자리에 앉자 후두둑 후두둑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아, 빗소리다.


 38층에 산다. 풍수로는 땅기운이 미치 8층 이하가 좋다는데 어디 이것저것 따지며 살 수 있는 세상이던가. 어지럽지 않냐, 흔들리지 않냐, 엘리베이터 고장 나면 어떡하냐 묻는데 살아보니 정작 땅과 멀어 곤란한 건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엔 비가 오면 빗소리는 당연 줄 알았다.  비와 빗소리는 같은 의미였다. 비가 소리 내며 내릴 리 없는데 '바닥이 받아줘야, 가랑잎이 스쳐야' 빗소리 들리는 간단한 이치를 전엔 미처 몰랐다.


 빗소리가 들린다. 바람을 타고 벽과 유리로 질주하는 폭주족 비. 가속페달 밟은 오토바이 소리를 낸다. 힘차게  바닥을 이뛰기하듯 소리를 전하 장대비 있다. 힘 좋은 활어처럼 팔딱는 비가 내릴 땐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우리 집은 빗소리가 안 들려" 하자 누구는 그게 왜 하고 누구는 나이가 몇인데 빗소리 타령이냐 타박했다. 진지하게 물었다. 몇 년간 빗소리를 듣지 못해 봤냐고. 개그 유행어를 덧붙였다. 안 해 봤으 말을 말길. 


 빼앗기면 안다. 음소거된 먼 비를 바라고 있으당연하게 여겼던 사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유전자 속에 각인된 오래된 순리. '스쳐서 생겨나는'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나야 들리는 그리움이 절실해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털며 한 사람이 들어온다. 체온을 재고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잡고 껴안으며 온으로 사랑을 전하던 일은 옛일이 되었다. 스치는 것이 불안하고 만나는 것이 금지된 세상.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 말을 빗소리로 덮는다.


 3500원을 소비하며 듣는 빗소리. 커피는 빗소리 사은품인가. 스치지 않고 만지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 받아 주어 생겨나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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