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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04. 2023

내 글쓰기 첫 글




5학년은 인생에서 예외가  해였다. 어쩌다 부반장이 되고 얼결에 부회장 됐다. 특출 난 데 없는 소심한 아이에게 그야말로 자리 복이 터졌다. 덕분에 학교 불우이웃 성금을 전달하러 방송국 가게 됐다. 텔레비전에 2초 나온다는 말 부회장 됐을 때보다 엄마 눈이 더 동그래지셨다. 초록색 나뭇잎 무늬가 들어간 재킷과 치마 세트를 주셨다.  빳빳하게 주름 잡힌  치마를 보 부반장이 됐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걸스카웃에 가입했다. 우리 집 형편으론 어림없을 텐데 담임 선생님이 지도선생님이라 엄마가 무리하셨을 게 뻔하다. 걸스카웃 단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단복을 입고 등교했다.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길이 갈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길고 흰 양말까지 갖춰 으면 딘가 특별해진 느낌이었다. 자는 부끄러워 자주 쓰지 않았다. 5학년이 끝나며 걸스카웃도 끝났다.



그 해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웅변대회일 것이다. 6월이 되면 학교는 해졌다. 6.25 기념행사가 한 달 내내 이었다. 글짓기, 표어 만들기, 공 도서 독후감 쓰기, 전단 줍기, 반공 포스터 그리기 등등 그중 하이라이트는 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웅변대회였다.



웅변대회는 5, 6학년 모두  반에  이상 참가해야 했다. 한 학년이 열두 반이었으니 한 명씩만 나가 스물네 명이었다. 예선을 거쳐 일곱 명만 본선에 참가할 수 있었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생님은 먼저 웅변학원 다니는 아이가 있는지 조사하고 아무도 없 나가고 싶은 사람 있는지 물으셨다. 아무도 손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부끄럽게 웅변대회에 나가고 싶겠는가. 나라면 절대로.



런 생각을 하며 곤란한 표정의 선생님과 가능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했다. 갑자기 옆에  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머, 나가려는 건가. 하긴  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떠드는 데엔 일가견 있 녀석이었다. 무줄 끊기 대장인 데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칠판 오른쪽 끝 떠든 사람 이름에서 빠지 날이 드물었다. 물론 적은 건 나였고 그럴 때마다 녀석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라고. 떠든 건 사실이잖아. 런 녀석이 웅변대회에 나간다 하니 드디어 재능을 발견한 모양이네 싶었는데,



"우리 반 부반장을 추천합니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부반장이라면 데. 추천한다고? 쳐다보니 이 녀석 뭐가 신나는지 웃음을 참느라 입을 실룩거린다. 이건 복수임에 분명했다. 웅변을 하니. 나는 웅변보는 것도 버거운 사람인데. 녀석은 나와 눈 맞추지 않으려 앞만 보고 있었다. 하려면 네가 하지 왜 나를 걸고넘어져 이놈아.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때 뒤에 앉은 녀석 친구가 "동의합니다."를 외쳤다.



당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일 번 '다수결 원칙' 이번  '청합니다' 삼 번'동의합니다'였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학급회의도 그렇게 진행됐다. 반장이 토론주제를 말하면 재청하고 다른 누가 동의하면 그것으로 끝났다. 체 의견이 필요할 땐 거수로 많은 쪽을 택했다. 민주주의는 엄중하고 절대적이었다. 못하겠다는 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거부권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좋았을 텐데. 못한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어 결국 내가 나가기로 결정됐다. 



선생님은 우선 원고가 필요하니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적어오라 하셨다. 아, 웅변은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 원고란 게 필요하구나. 5학년 때 처음 마감기한 받은 셈이다. 글이라곤 숙제 쓴 독후감과 일기뿐인데 다짜고짜 원고라니. 어쩌겠는가. 발등에 불은 떨어졌고 울며 욕하며 , 이노무시키 두고 보자, 주말 내내 틀어 박혀 쓰기 시작했다.



마감의 위력 대단다. 인지 밥인지 모르게 원고가 지어졌다. 선생님은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겠다 말씀하셨다. 이런저런 조언을 주셨는데 그것이 내가 받은 첫 번째 피드백이라 하겠다. 이야기 하나를 지어내기로 했다. 이제 나는 소설까지 써야 했다. 며칠을 심하며 이리 쓰고 저리 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웅변 학원 선생님, 부모님이 원고를 대신 써주었단다.



글을 다시 가져갔을 때 선생님이 칭찬하셨다. 역시 퇴고는 중요다. 가까스로 원고를 보했지만 '이 연사 목놓아 외칩니다'  웅변조 말투도 연습해야 하고 팔 들기도 익혀야 했다. 처음엔 한 팔, 끝에 가선 두 팔, 두 팔을 올렸을 땐 목이 아프도록 소리치고 눈에 힘을 줘야 했다. 연습밖에 답이 없으니 학교에서 마당에서 방에서 계속 연습했다.



 해는 뭘 해도 되는 해였나 보다. 초짜 웅변가인 주제에 상을 받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웅변 내용이 슬프고 아름답다 하셨는데 상보다 그 말이 더 좋았다. 아이답게 쓴 글이라 좋게 봐주시지 않으셨을까. 시 글에는 긍정적 리뷰가 중요하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원고는 재활용했다. 우애 좋은 두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전쟁 때문에 남북으로 헤어졌다 전쟁터에서 재회한 이야기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깜짝 놀란 건 그때 썼던 글과 비슷해다. 물론 내 글엔 원빈 같은 동생은 없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어느 마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시작하던  글쓰기 첫 글.  아, 그러고 보니 그때만 해도 6.25 전쟁이 30여 년 전이었구나. 이젠 헤어진 형제가 다시 만나기 려운 73년 전이 되었다. 나를 웅변지옥으로 집어넣은 녀석은 어디서 잘 살고 있을까. 어쩌면 그 애도 얄미운 부반장 얘길 할지 모르겠다. 떠들지도 않았는데 자꾸 내 이름을 적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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