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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Oct 31. 2021

추억은 시간을 박제한다

네가 되어



"서면이라니까."

"남포동이라니까."


"그날 영화보....제목이 기억 안 나네."

"그래 그러..."


"지하에 있는 까페였잖아. 애니. 난 거기 이름도 기억한다고."

"맞아. 애니. 지하 lp 틀어주는데. 내가 그때 경환이 선배한테 분위기 좋은 데 알려 달라 그랬거든 ."


"그때는 검색이란 게 없었으니까. 요즘엔 검색하고 후기까지 지만 그땐 그런 게 어딨어. 다 물어서 갔지."

" 날 내가 와인 시키고 과일안주랑. 목걸이도 줬잖아."


"목걸이도 줬어? 그건 기억 안 나. 그런데 무슨 안주까지 기억하냐."

"첫 키스 한 날이잖아."


"정확히 말하면 뽀뽀, 첫 뽀뽀. 어쨌든 서면이었어."

"남포동이라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거기 아직 있을까?"

"글쎄. 을까? 삼십 년 전인데."


"벌써 삼십 년이나 됐다니. 왠지 아쉽. 우리가 벌써 그렇게 나이 먹었나 싶고."

"딘지 기억 못하면서 아쉽긴."


"서면이라니까."

"남포동이라니까."







대학 2학년 봄, 과에서 단합대회 겸 야유회 초읍에 있는 놀이동산에 갔다. 놀이기구 타는 걸 무서워했는데 무슨 심본지 짓궂은 선배 몇이 억지로 청룡열차에 태웠다. 바이킹도 못 타는 나는 무척 겁이 났다. 청룡열차가 달리고 빙글 돌 때마다 들려오는 꺅꺅 소리가 귀신의 집만큼 무서웠다.

먹고 앉아 있는데 얼굴만 고 지내던 예비역(군대 다녀와 복학한) 선배가 말없이 옆에 툭 앉더니 잡으라며 팔뚝 하나를 내주었다. 처음엔 '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 팔뚝 막 잡고 그러는 사람 아니...'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팔뚝에 매달려 죽네 사네 소리를 질렀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생사가 오가던 순간엔 몰랐는데 놀이기구에서 내리고 나니 5월 햇살이 얼마나 환하고 따뜻하던지. 5분 전에 보인 추태를 파란 하늘 아래 숨길 없어 민망하고 뻘쭘했다. 그런 나를 보며 선배말없이 웃었다. 아마도 그때 처음 그에게 반 모양이었다.



1990년이었고 매일 맡던 최루탄 가스 냄새가 한 달에 한 번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수업을 마치고 과사무실에 는데 문 밖으로 노래가 들렸다. "그대 손짓하는 여인아. 은하수 건너 ~" 문을 여니 선배 동기 합해 대여섯이 둘러 앉아 있고 팔뚝 선배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선배는 칠월 칠석에 태어났다고 했. 그래선지 '직녀에게'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무심코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그 노래가 좋아졌다. 머리를 말리다 길을 걷다 하늘을 보다 커피를 마시 나도 모르게 자꾸 흥얼거렸다.



"나랑 데이트할래?"라는 촌스런 말로 태종대에서 첫 데이트를 했다. 팔뚝을 잡은 지 일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자갈마당에 앉아 그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 후회에 눈이 어지더니 자신은 다정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고 동그란 자갈이 조금씩 붉게 반질거렸다. 나는 그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거에요 라고 말했다.

석 달 뒤 서면인지 남포동인지 모를 그곳에 앉아 있었다. 목걸이를 받았는지 과일안주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에게 잘 보이려고 고심 끝에 골라 입은 치마가 어색해 내내 신경 쓰였고 분홍색 립스틱이 이뻐 보일궁금했다. 카페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우리는 바 오른쪽 끝자리 둥그런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와 나 말곤 주위가 온통 모자이크처리됐다.


술을 마시지 못바도 처음이었는데 어리게 보까봐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다. 그가 탁자 위에 올린 내 손을 잡고 손 아래 '애니'라고 적힌 냅킨이 있었다. 나는 보다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을 보고 그아래 작고 떨리는 내 손을 보고 냅킨 봤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가 내 손을 들어 입을 맞췄놀란 나를 바라 내 입맞춤했다.







놀이동산을 떠올리면 머리 위로 청룡열차가 달리고 그아래 끄럽게 웃는 내가 보인다.  안에선 기타를 치며 가 노래하고 있고 자갈 위에 앉은 우리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이.


추억 속에선 모든 시간이 네가 된다. 놀이동산이 네가 되고 그 노래가 네가 되고 그 까페가 와인이, 노을이 네가 된다. 세상이 온통 너라 매 순간 렌다. 십 년이 지나 면인지 남포동인지 기억나지 않 그날 그 테이블의 질감과 와인향 고스란히 오른다.

나는 가끔 추억에 들린다. 추억은 시간을 박제하고 온통 네가 되어린 세상에서 그때처럼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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