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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25. 2023

소감 한 방울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를 펴놓은 채 밥을 먹다 귀퉁이에 국 한 방울 떨구었다. 급하게 마른 휴지로 닦았지만 간 배인 종이엔 얼룩이 스몄다.

시인 뵙기 민망하여 젖은 휴지로 슬쩍 문질렀더니 이번엔 성난듯 우둘투둘 일어선다.

시를 읽으며 무슨 밥을 먹겠다고, 밥을 먹으며 무슨 시를 읽겠다고. 속상한 눈길로 결 달라진 귀퉁이를 보는데 먹고 산다는 게  이리도 구질할까.

산다는 건 삼시세끼 먹는 거래서 엄마도 그랬고 다들 그렇대서 내 입에 넣을 밥부터 구하는 게 먼저인 줄 알았는데 암만 생각해도 사는 건 그게 다가 아닌 듯 싶다.

세상 대신 겨우 책장에 분노하고 다시 밥을 먹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는 게 왜 이리 설운 것인가.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ㅡ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세상에 화내지 못하고 밥벌러 가기 위해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시를 읽고 먹은 그릇을 치우고 다시 시를 읽어봤자 귀퉁이나 얼룩지게 할 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맘 속 얼룩에 비하면 이 얼룩은 얼마나 솔직한가.

자고로 시란 가만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 오래 조심히 보아야 감지되는 것, 누구나 보지만 누구나 볼 수 없는 기록이다.

나는 오늘 김수영의 시 귀퉁이에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소감 한 방울을 흘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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