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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30. 2023

나는 엄마와 50년 만났다.



첫 진단은 당뇨였다. 외할머니가 당뇨를 오래 앓다 돌아가시고 둘째 넷째 이모도 몇 년째 고생 중이라 그런지 엄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당뇨는 예상 가능한 가족력이고 찜찜하지만 당장 죽을병은 아니었다. 엄마는 언젠가 올 줄 안 언짢은 손님 맞듯 당뇨를 받아들였다. 일 년 뒤 보건소에서 지방간 진단을 받았다. 체중을 5kg 감량하라는 말에 저녁마다 근처 공원을 두세 바퀴씩 돌기 시작했다. 건소에서 3개월만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지만 본인 부담금을 내고 추가로 3개월 치 더 먹었다. 약을 두 배로 먹으면 두 배로 건강해질 거란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알약이 두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는 동안 엄마에게 이상한 일이 많아졌다. 여러 번 넘어지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더니 안 자던 낮잠을 몇 시간씩 잤다. 나는 엄마의 병이 작은 알약 몇 개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균형을 잃고 말투가 어눌해지는 증상을 검색하며 파킨슨병을 의심했지만 두 번이나 찍은 뇌 사진에서는 아무 문제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밀검사 후 받은 결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간경화'. 엄마는 믿지 않았다.


다른 병원 두 곳에서 재검사를 받았다. 두 곳 모두 같은 진단을 내리자 엄마는 팔자를 타령하고 원망했다. '네 아빠가 고생시켜서' '열여덟 살에 봉제공장에 들어가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해서' 이렇게 된 거라 울었다. 진단 후 엄마는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숨어있던 증상들이 이젠 숨을 필요가 없다는 듯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활기가 사라지고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초등학생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이상해. 죽은 거 같아."     


화장실 앞에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간성혼수였다. 간성혼수는 약해진 간이 몸 안의 암모니아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해 생긴다. 엄마는 간성혼수가 오면 눈은 뜨고 있어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몸을 가누지 못했다. 12년을 앓는 동안 1년에 두세 번씩 간성혼수로 응급실에 갔다. 그때마다 삶의 질은 떨어졌다. 뇌는 쪼그라들고 팔다리는 힘을 잃었다.


한번 입원할 때마다 이삼백만원씩 병원비를 내야 했다. 25평 연립주택 엄마 집을 팔고 살던 집 전세금을 보태 병원 근처로 이사했다. 엄마는 20년 살아온 동네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일하고 두 아이 키우며 간병하려면 병원이 가깝고 병원비도 마련해야 했다. 이사가는 날 엄마는 유배지로 떠나는 자의 눈빛이었다. 병은 살던 동네를 떠나게 하고 친구를 잃게 했다.

     

나는 설거지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이 결혼했다. 엄마는 열 살도 안되 동생 업어 키우고 물 긷고 빨래하고 살림을 했다. 그게 서러워 나중에 딸을 낳으면 곱고 예쁘게만 키워야지 결심했다고 한다. 결혼 후엔 엄마 집 두 층 위에 살았다. 두 아이 모두 엄마가 키워주고 퇴근 후엔 엄마 밥을 먹었다. 아침에 정신없이 어지르고 나간 집이 저녁엔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엄마가 아프고 역할이 바뀌었다. 엄마에게 돌봄받던 나는 이제 엄마의 엄마가 됐다.     


처음 몇 해는 엄마가 나을 거란 희망을 품었다. 암 환자가 먹고 나았다는 건강식품을 칠백만 원 주고 샀다. 병원을 수소문해 서울에 올라가고 잘 본다는 한의원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완치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책을 읽고 간과 당뇨에 좋은 재료로 삼시 세끼를 차렸다. 혈당이 안정되고 간 수치가 좋아진 날엔 희망으로 들떴다 간성혼수가 오고 응급실에 가면 다시 절망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렇게 5년을 보내고 나는 엄마의 완쾌를 포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혈당을 확인하고 꼬박꼬박 약을 챙기고 간성혼수가 오는지 살피는 것뿐이었다. 위급 시 1분이라도 빨리 응급실에 도착하는 게 전부였다. 생각했다. 만약에 아픈 사람이 나였다면, 엄마가 나를 돌봤다면, 엄마도 이쯤에서 포기했을까. 아니, 내가 나를 포기했을까. 더 비싼 건강식품을 사 먹고 더 악착같이 나을 방법을 찾진 않았을까. 나는 내가 한 포기가 최선의 실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엄마는 죽기 2년 전 간암 판정을 받았다. 간경화 진단을 받은 지 10년이었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오랜 투병에 체력이 약하고 치료해도 기대 연명이 길지 않다는 이유였다. 다른 곳으로 전이되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의사는 종양도 살아있는 세포라 간경화가 진행된 간에서 갑자기 커지거나 전이될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그 말은 엄마의 간이 암세포조차 살기 힘들 만큼 죽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암세포가 자라지 않을 거란 의사의 이 불행 중 불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2년이 흐르며 엄마의 병은 일상이 되어 갔다. 아침마다 손가락에서 한 방울의 피를 뽑아 혈당 검사를 했다. 처음엔 볼펜처럼 생긴 바늘침을 누르는 것도 서웠는데 몇 년이 지나니 배에 인슐린 주사를 맞는 걸 봐도 무뎌졌다. 1년에 두세 번씩 가는 응급실 행 불편하지만 꼭 찾아오는 연례행사처럼 느껴졌다. 5년 넘게 누워서만 지내는 엄마를 어느새 당연한 모습으로 여겼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고통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반면에 엄마를 돌보는 일은 갈수록 버거다.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병원에서 자는 일은 엄마를 사랑해도 힘들었다. 엄마가 가여워 울기도 했지만 내가 불쌍해 울기도 했다. 나 대신 누군가 할 사람이 있다면 도망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엄마라고 생각했지만 내겐 엄마를 바라보는 내 고통이 더 가까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세상이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경계까지라면 기적인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죄책감에 시달릴지라도 엄마는 여전히 내 세상이었다. 엄마를 바라보며 느끼는 고통은 엄마를 지키기위해 지키고 싶어 느끼는 감각이었다. 도망가고 싶었으나 도망갈 수 없는 엄마를 통해 자주 시험받고 한계를 확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괴로움을 통해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는 집에서 잠든 채 돌아가셨다. 예상하지 못한 날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 병원에서 죽기 싫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엄마가 바란 것 중 그 하나만 온전히 얻었다. 장례를 치르고 혼자가 되었을 때 기억을 압수수색했다. 엄마가 가는데 세상과 내게 아무 조짐이 없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 달 전, 일주일 전, 삼 일 전, 하루 전, 그날. 운세를 뒤졌다. 21일, 4월, 2020년, 다시는 운세 따위 믿지 않기로 했다.   

   

나는 엄마와 50년 만났다. 그중 38년은 엄마에게 돌봄을 받고 12년은 엄마에게 받은 것을 가까스로 흉내 내며 엄마를 돌봤다. 엄마의 병으로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삶의 유한성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됐고 때때로 엄마를 기억하고 떠오리며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란 걸 느낀다. 부모는 죽음으로도 자식을 가르친다. 내가 엄마의 엄마였던 시간은 희미해지고 엄마가 엄마였던 기억이 또렷해진다. 사랑했지만 버거웠 힘들었지만 애틋했던 순간들. 엄마와 나는 서로 없이 하루도 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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