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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6. 2023

희미하게 믿는다

나의 종교는 방황



종교가 있냐는 질문은 언제나 난감하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모태 신앙은 아니스무 살 초반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자발적이진 않았다.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신 건 성가대 반주하는 딸을 보고 싶어서였다. 피아노를 싫어하고 잘 치 못했지만 나는 엄마 소원대로 결혼 전까지 성가대 반주를 했다.


결혼. 사전적 정의는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사랑을 운운하고 싶진 않지만 게 다인가 싶어 여러모로 아쉽다. '남녀'라는 말의 고정관념이 불편하고 '정식'이라는 단어도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결혼은 사적 관계 공적 관계로 전환하는 일이. 그렇다보니 문서도 정리하고 증인도 부른다. 그래서 결혼은 분잡스럽고 이혼은 번거롭다.



결혼의 개인 정의 다양하지만  집에서 탈출하려고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그게 진실이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건 아니었고 마침 사랑한다 믿어지는 이도 있는 데다 결혼해도 괜찮은 나이 됐으니 자, 이제 당당히 공식적으로 집을 떠나도 문제 없겠지, 한 것이 결혼이었다.


결혼하며 비자발적 종교도 탈출했다. 교회가라는 잔소리는 이어졌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니 회피하기 쉬웠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지금까지 왔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맘 편히 무교라 하지 못한다. 아빠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세요. 팔순이 다 되어가시는데 아직도 성경필사를 매일 하신다니까요.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하고 '예전엔 다녔고 지금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영화제목을 카피기도 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답을 듣고 대부분 안타까워한다. 어릴 적 신앙심과 부모의 기도는 어디 가지 않는다며 지금이라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한다. 나는 종교와 교회가 같지 않고 것들의 긍정적 요인부정적 측면 잘 안다 스스로 지만 논쟁을 늘어놓고 싶 않다. 탕자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모자란 종교심과 족한 사회성. 무엇보다 의구심. 제가 게을러요. 일요일에 교회 갈 만큼 부지런하질 못해요.


오늘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다 내가 왜 그간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물쩍 뭉개는 태도를 보였는지 깨달았다. 갈피 없는 대답의 '방황'을 이해했다. 책에서 작가는 정치와 종교의 의심스러운 결탁을 논는데 글의 논지와 더불어 앞으로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영감 얻었다. 백중현의 <<대통령과 종교>>에서 발췌한 문단이었는데 나 역시 아래 구절에서 더는 페이지를 넘기지 못다.


"노무현은 세례 받은 천주교인이었지만 종교에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2002년 대선 후보 시절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을 때, 1986년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성당에 자주 못 나가서 종교란에 무교라고 쓴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 물었고, '희미하게 믿는다'라고 답했다. 추기경이 확실하게 믿느냐고 재차 묻자 노무현은 잠시 고개를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습니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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