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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민 Nov 01. 2020

할머니의 만둣국과 바퀴벌레

이것은 바퀴벌레인가, 검은 깨인가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고기를 넣은 만둣국을 해 줄 테니, 언제 할머니 집으로 오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시간 날 때 가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가는 건 세 달에 한 번 정도였다. 할머니의 집은 부천이었는데,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일산에서 지하철로 1시간을 꼬박 가면 특유의 부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20년 전의 부천은 회색빛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안개가 낀 것도 아닌데 도시가 회색빛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어릴 적 마음이 투영된 걸까? 아님 그냥 내 시력에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정신과든 안과든 둘 중 한 곳에 가봐야겠다.


할머니의 집은 매우 허름했다. 문을 들어가면 작은 신발장에 방 하나가 전부였다. 할머니는 손자가 온다는 말에 신발장에서 만둣국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반겨주시며 특유의 하이톤 인사법을 구사하셨다. 그리고는 뜨거운 전기장판에 들어가 몸 좀 녹이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오느라 더운 데도 전기장판에 들어갔다.

한 겨울에 난데없는 이열치열을 느끼며 나는 몸을 기대 맞은편 TV를 보았다. 낡고 오래된 브라운관 TV였다. 할머니는 종편 채널을 틀어놓으셨다가 tvN으로 채널을 돌리셨다. 방송작가인 손주가 일한다는 채널을 기억하신 모양이다. 그러더니 대뜸 나는 언제 TV에 나오시냐고 물었다. 할머니, 저는 방송작가라 TV에 안 나와요,라고 말을 해도 소용없으시다. 결국 나중에 나올 거예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먹음직스러운 만둣국 냄새가 어느새 풍겨왔다.


곧 체리색의 좌식 테이블에 할머니는 만둣국을 '대령' 해오셨다. 정이 느껴지는 큼지막한 만두에 떡도 들어가 있었고, 국물 위에는 비싸 보이는 고기와 검은깨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할머니는 안 드시냐고 묻자 당신은 항상 그렇듯 저녁을 드셨다고 한다. 내가 첫술도 뜨기 전에 할머니는 '더 줄까?'라고 말하셨다. 역시 전 세계의 할머니는 만국 공통인가 보다. 나는 TV를 보며 만둣국을 먹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잠깐 먹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다시 재료 손질을 하러 신발장 쪽으로 향하셨다. '뭐가 더 준비돼 있는 건가', 약간 두려웠다.


그렇게 나는 푸짐한 만둣국을 먹으며, 할머니 집까지 와서 예능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숟가락으로 국에 들어있는 왕만두를 잘라먹으려는데, 검은깨 하나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아니, 움직였다는 표현보다는 '꿈틀'거렸다. 불길한 기운이 확 들었다. 20년 전 부천에서 봤던 그 바퀴벌레. 그중에서도 크기가 작은 바퀴벌레 새끼였다. 아닐 거야,라고 속으로 한 번 부정했다. 그래, 뜨거운 국물의 열에너지에 의해서 검은깨가 구심력을 받아 꿈틀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퀴벌레 새끼가 박태환처럼 힘차게 수영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이것은 검은깨가 아니라 명확한, 확실한, 살아있는 바퀴벌레임을. 


순간 식욕이 확 떨어졌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검은깨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99개의 검은깨가 전부 바퀴벌레로 보였다. 나는 고민했다. 계속 먹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고스톱을 하듯 고뇌에 빠진 나는 할머니의 눈치를 스윽 보았다. 정성스레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결국 난 숟가락으로 작고 귀여운 바퀴벌레 새끼를 건졌다. 그리고는 휴지로 감싸 완전 범죄 현장을 만들었다. 때마침 할머니가 뜨거운 만둣국 국물을 가져오셨다. "국물이 식었지?" 나는 괜찮다고 입술을 떼려는데, 할머니는 뜨거운 국물을 퍼부어주셨다. "만두랑 떡도 더 먹어."라며 그 위에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아주 그냥 사랑을 때려 퍼부어 주셨다. 나는 조금 전 기억을 애써 삭제하고는 다시 뜨거워진 만둣국을 먹었다.

뭐가 바퀴벌레고 뭐가 깨인지 께름칙했지만, 그냥 먹었다.


할머니 : 여깄다, 한 공기 더 먹어라.
나 : 배불러요 할머니. 더 이상 못 먹겠어요.
할머니 : 그럼 소화제 하나 더 먹어라.

할머니들은 항상 더 먹으라고 한다.

                                                                                엄마 없는 농담, <할머니> 중에서

    

훈훈한 식사와 담소를 마친 후, 나는 할머니 집을 나왔다. 너무 먹어서인지 배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신데도 지하철 역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무조건적인 사랑, 할머니가 나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처럼, 나도 만둣국에 바퀴벌레가 들어있든, 어떻든, 조건 없이 보답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날 이후로 검은 깨는 잘 먹지 않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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