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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민 Oct 20. 2022

2만 원짜리 모자

좌우지간 우린 모자지간

나는 한때 모자를 즐겨 썼다. 방송국에 회의를 하러 갈 때면 집에 있는 모자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고른 뒤에 푹 눌러쓴 채로 지하철에 몸을 싣는 걸 좋아했다. 사실 모자 자체를 패션 아이템으로서 좋아한다기보단 모자가 주는 간편함이 좋았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말린 뒤 빗질이나 요상한 헤어 제품들을 바를 필요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저주받은 악성 곱슬머리라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애써 만든 헤어스타일이 '초기화' 됐다. 바람이 세게 불수록 더욱 가관이다. 그 지경이 되면 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들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점점 더 불규칙한 혼돈에 빠지곤 했다. 아마 메두사의 뱀으로 된 머리보다 내 곱슬머리가 훨씬 더 관리하기 힘들 것이라 자신한다. 뱀의 피부는 촉촉하기라도 하지, 내 반항적인 머리카락들은 수세미처럼 빳빳했다. 잘못 낸 수능 문제처럼 답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모자는 슈퍼맨 같은 것이었다. 못된 바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엄마도 모자를 즐겨 썼다. 위암 진단 전부터 종종 쓰셨으니 원래부터 모자를 좋아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자식으로서 부모의 사소한 취향조차 등한시했다) 물론 항암 치료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머리카락이 수두룩 빠지면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셨으리라. 그런 면에서 우리 모자(母子)는 서로 모자(帽子)로 이어졌다. 나는 곱슬머리를 덮으려 모자를 썼고, 엄마는 빠진 머리를 덮으려 모자를 썼다. 우리는 '바람'과 '발암'으로부터 맞서 싸웠다. 우리 각자의 콤플렉스(complex)를 숨기기 위해.


Complex


엄마를 떠올리면 그야말로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그 중, 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엄마에게 모자를 사드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과거로 돌아가 보면, 코미디를 하겠다고 결심을 먹었을 때 떠오른 직업은 단 하나였다. 그때는 방송작가라는 개념을 잘 몰랐으므로 '개그맨'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개그맨을 한다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 것이다. 코미디를 하겠다고 부모님과 싸운 직후였으니, 한마디로 집을 나온 것이다. 당시에는 서울로 오면 어떻게든 꿈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포부 넘치는 주인공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니까.'라는 얕고 철없는 망상 섞인 생각을 가졌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생존 문제와 맞닥 뜨린 것이다. 나는 참 모양 빠지는 다음 행동에 나섰다. 부모님께 전화를 해 돈을 조금 달라고 한 것이다. 아빠는 알아서 하라고 했고, 엄마는 어쩔 수 없다며 걱정하셨다. 그렇게 현금 지급은 거절당했고, 갈 곳 없는 나는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생애 첫 노숙이었다.


띄엄띄엄 숙면을 취하던 노숙자들 사이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겨울이었던 당시 나는 그야말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잠잘 곳을 찾느라 발뒤꿈치는 까져서 피가 났다. 이대로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나는 대피할 곳을 탐색했다. 그리고 찾았다. 바로 인력사무소로였다. 일을 해서 현금을 쟁취해 잠잘 곳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인력사무소 실내는 오래된 난로 덕분인지 정말이지 따뜻했다. 인력소장은 따뜻한 믹스커피를 주며 극진 대우를 해줬다. 커피로 몸을 녹인 나는 해본 적도 없는 노가다 일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장은 깡마른 나를 쳐다보며 사형 선고를 내렸다. '노가다를 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당연히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노가다 일, 그것을 거절당한 거였다. 가치 없는 잉여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미 '코미디'는 안전에도 없었다. 내가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빌어먹을 코미디는 무슨.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걸까. 우연히 주유소 모집 공고를 본 나는 까진 발뒤꿈치와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거지꼴 행색을 하고서 면접을 본 뒤 나는 주유소에서 일하기로 했다. 숙식이라 잠잘 곳 걱정도 없었다. 이제야 코미디의 길로 나아갈 첫발을 내디딘 것 같았다. 하지만 코미디는 개뿔. 먹고 살기 위해 나는 '주유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주유원의 업무는 간단했다. 주유원들은 경비초소 같은 1평짜리 대기실에서 그저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기름을 넣을 차가 들어올 때까지. 차가 주유소로 들어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고서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주유를 마치고 나면 다시 감옥 같은 대기실로 복귀하는 것이다. 차에 기름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차종에 따른 기름을 확인하고,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으면 노예가 되니 조심해야 한다. 수리비를 갚느라.) 기름 뚜껑을 열고, 주유구에 기름 총을 넣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기름만 넣으면서 언제부턴가 농담을 만드는 법보다 휘발유에 대해 더 빠삭해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꿈은 현실에 잡아먹히곤 했다. 그렇지만 이 일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으니까. 주로, 아니 전부 개고생이거나 죽을 뻔한 일이었다는 게 흠이지만.


1. 외국인은 발음이 왜 이래

나         : 얼마 넣어드릴까요?
외국인   : (영어로) forty.
나         : 예?
외국인   : (영어로) forty.
나         : full? (가득?)
외국인   : (손가락 4개를 펴며) forty.
나         : ...full? (가득?)
외국인   : (손가락 4개를 펴며) no. forty!
나         : fully! (그러니까 가득!)
외국인   : 아. (아마 이랬을 것이다)


그땐 왜 forty란 영어 단어가 안 들렸을까. 손가락 4개까지 친절히 펴준 외국인에게 미안하다.


2. 담배 피면 안 돼요?

나        : 여기서 담배 피시면 안 돼요!
손님     : (담배 피며) 왜요?
나        : (여기가 주유소인 것을 인지시킨다) ...다 죽는데요?
손님     : 아? (그러더니 몇 걸음 옆으로 가서 다시 담배를 피운다)
나        : 아.


그렇게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한 나는 어느새 전문 주유원이 되어 있었다.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뜻한 숙소와 기름칠한 배때지에 꿈이 조금 흐려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월급을 받았다. 150만 원이 넘는 두둑한 봉투. 당시에 사장은 월급 전부를 현금으로, 봉투에 담아 지급했다. 무릇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더니 그 때에 나는 세상 누구보다 충만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실 행복은 어느정도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같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 때면 혹시 돈이 모자라지는 않은지 한번 확인해보자.


현금다발을 들고 나는 파주(집)로 금의환향했다. 그리고는 마치 졸부처럼 나는 부모님께 무엇을 사드릴지 고민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여기서 발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금으로 100만 원을 드리거나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엄마에게 '모자' 하나를 선물로 사드렸다. 고작 2만 원짜리 아디다스 모자. 겨우, 2만 원밖에 안 하는 모자 말이다. 왜 그랬을까. 왜 더 좋은 걸 사드리지 않았을까. 철이 없었다. 나는 아직 청소년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첫 월급으로 엄마에게 2만 원짜리 모자를 준 것. 죄책감이 들고, 이것은 아직도 후회로 남아있다.


2014년.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떠나보낼 때 우리는 노잣돈으로 오만 원권 지폐를 넣었다.

그리고 지금. 원달러 환율이 고공 행진하고 있다.

'아, 노잣돈 달러로 넣을걸.'

                                                                              엄마 없는 농담, <후회 되는 일> 중에서


나름 작가로 생활이 안정적으로 변한 요즘. 값이 나가는 물건을 살 때면 왠지 양심에 찔리곤 한다. '투병 중인 엄마에게 2만 원짜리 모자를 사줘 놓고?' '넌 지금 메종키츠네 맨투맨을 산다고?' 스스로에게 징벌을 가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 아디다스 모자 대신 함께 제주도를 여행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을 많이 찍어놓을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성인이 된 후 엄마와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 나는 후회와 불효

로 점철된 인간이다. '뱃가죽이 뜨듯하니 엄마는 안중에도 없지?' 내가 나에게 속삭인다.


요즘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코미디로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많은 유명세도 떨치고 말이다. 내 이름이 알려지는 것,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2만 원짜리 모자를 준 행동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자(母子)는 부자(者)가 되지는 못했지만

우리 모녀지간에는 모자(帽子) 밖에 공통점이 없지만

우리 부자(子) 부자(者)가 될 것이다.

우리 부자지간에는 모자(帽子) 이상의 호화를 누릴 것이다.


앞으로 아빠와 함께 엄마가 못 누린 것을 함께 누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엄마 또한 좋아하시겠지.

샘내시진 않을 거다, 좌우지간 우린 모자지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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