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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민 Oct 25. 2022

엄마의 성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Miss 그리고 Missing

인천에 이사와 좋은 것 중의 하나는 아라뱃길이다. 평소 걷는 것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나에게 물이 광활하게 펼쳐진 이곳은 그야말로 적격인 곳이었다. 걷기와 커피는 소소하지만 나의 취미 중 하나다. 커피를 들고 자유롭게 거닐면 그것만큼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 없다. 인적이 드물고 자연 친화적인 곳일수록 더 좋다. 걸으면서 각종 아이디어를 짜내곤 하는데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신경이 분산된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한강공원보다 아라뱃길이 훨씬 좋다. 물론 한강공원의 풍경도 좋지만 내향적인 나 같은 사람에겐 다소 무리가 있달까. 돗자리를 깔고 앉아 다닥다닥 붙어있는 한강공원의 사람들이 나는 존경스럽다. 몇 번 가본 나로서는 '한강이 뭐가 저렇게 좋다고'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강 근처에 살라고 해도 굳이 살지는 않을 것 같다. 아, 거짓말이다. 실은 한강 저변의 아파트를 살 돈이 없다. 1/10도 없다. 그렇지만 못 산다고 하는 것보다 안 산다고 하는 편이 더욱 마음에 좋으니까, 나는 안 산다고 말하고 다니련다.


아라뱃길은 걷기뿐만 아니라 달리기를 하기에도 좋다. 나는 주로 해가 진 저녁이나 밤에 런닝을 뛰는데, 그땐 낮보다 사람이 더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라 아예 없는 곳이 돼버린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어두컴컴한 밤이 되니까 사람이 몇 명 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상한 사람 몇 명'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 몇 명'말이다. 밤길을 혼자 걷거나 뛰고 있으면 몇번씩 괜히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럴 땐 작가인 것이 해가 된다. 상상력을 발휘해 각종 범죄를 연이어 떠올리곤 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라뱃길은 뉴스와 언론에도 사고의 온상지로 몇 번 크게 나온 곳이었다. 장소는 같았지만 낮과 밤은 이렇게 달랐다. 낮에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취향' 문제였지만 밤에는 이상한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남자인 나조차도 밤길은 무서웠다. 그러다가 예전 동료 여자 작가가 나한테 한 말이 기억났다. 밤에 달리기를 하러 간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바로 반응했다. '부럽다'고. 짧지만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밤에 자전거를 타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나가질 못한다고 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남자라서 밤길이 '덜' 무서웠던 것은 맞는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남자와 여자가 '지금 어떻고' '이래야 한다' 류의 말은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혹자는 겁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방관자라고 욕할 수도 있겠다. 사실 겁쟁이라 몸을 사리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적을 최소화 시켜야하는 직업적인 족쇄가 있다고 변명을 해본다. 논란이 생기면 나의 커리어는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내 입으로 내 의견도 말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 나는 회색분자다. 적당히 먹고 살기 위해 혓바닥을 사리는 회색분자.


성(性)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선을 잘 지켜야 하는 코미디는 더욱 그렇다. 1년 전, 10대의 성(性)에 관한 웹드라마를 쓴 적이 있는데 쉽지 않았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자위 중독'에 빠진 남학생의 이야기였다. 그런 혈기 왕성한 남학생이 좋아하는 같은 반 여학생에게 고백하기 위해 100일 동안 자위를 멈춘다는, 소위 말하는 '금딸'에 대한 내용이었다.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OTT에 올라와있는 작품이라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극본을 썼음에도 주변 어른들에겐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자위'에 대한 내용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성(性)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성역도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건 왜일까. 침묵은 금이라지만, 반대로 영원한 침묵은 독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나는 농담을 만드는 사람이니, 사회적 문제를 다룰 직업적 의무가 있다. 나는 조금씩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진정한 성의 평등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성(性)과 성(姓)은 그 글자처럼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김 씨인데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여 씨이다. 그런데 가끔은 나에게 여씨 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깜빡 잊곤 한다. 분명 나는 절반만 김 씨인 혼혈(하프 김 씨, 하프 여 씨)인데, 평생을 김 씨로만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평등이 아닌 것 같다. 잃어버린 엄마의 여 씨를 되찾아야 할 것 같다.


Miss


잃어버리다와 그리워하다가 같은 단어인 것은 내가 당신의 성씨를 잃어버려서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현민인 동시에 '여'현민이다. 후자는 발음에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나중에는 자식의 성씨를, 아빠와 엄마 성씨 중 아무거나 자유롭게 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우리 아들이 다 컸네. 자기 이름의 역사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아빠              예전에는 자식은 아버지의 성씨만을 따랐단다. 하지만 세상은 점차 바뀌었지. 
엄마              꼭 아빠의 성씨뿐만 아니라 엄마의 성씨를 따라도 되는 세상이 온 거야. 
아빠              고민 끝에 우린 너의 이름에 둘 다 붙이기로 했단다. 
엄마              엄마의 성씨와 아빠의 성씨 모두를 말이야. 
아빠              이제 설명이 좀 됐니 민수야?
자위민수        아. 

민수의 눈에선 왠지 눈물이 흘렀다.

                                                                                    엄마 없는 농담, <성평등> 중에서

그저 농담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기를. 나는 정말이지 남자와 여자가 싸우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어떤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밤이 되어도 아라뱃길을 맘 편히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내 절반의 성씨가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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