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민 Oct 24. 2022

암 걸린다는 표현

불편함에 대한 단상

요즘 인터넷을 하다 보면(간혹 일상 중에도) '암 걸린다'는 표현을 종종 보게 된다. '답답하다'나 '짜증 난다'

는 심정을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하기 위해 쓰는 듯 보인다. 엄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나로선 이런 표현을 볼 때마다 소위 '불편'해지는데, 뭐 그렇다고 댓글을 달거나 신고 버튼 따위를 누르지는 않는다. 해당 표현을 쓰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슨 '암 환자'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을 갖고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마 불편하리라는 생각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리라. 문제는, '이게 뭐가 불편해?'라고 나올 때이다. 나는 '불편함'과 '개인의 자유' 중 어떤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B      : 아 ㅋㅋ 직장생활 암 걸리겠네.
나    : 저기요. '암 걸린다'는 표현은 조금 불편한데요.
B      : 왜요? 스트레스 받아서 암 걸릴거 같다는 건데. 과학적인 팩트잖아요.
나    : 그래도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B      : 뭐가 불편하죠? 그럼 암걸린다는 표현 말고 뭐라 해요? 그냥 '짜증난다'고 할까요?
         그걸론 제 마음이 표현되지 않는데요? 왜 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시죠? 
         님이 제 자유를 억압해서 저야말로 '불편'하네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죠? 네?
나    : (아. 진짜 암 걸리겠네.)

                                                                            엄마 없는 농담, <암 걸리겠네> 중에서


반면 나는 불편함을 '받는' 입장에서 반대로 불편함을 '주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방송작가로, 더군다나 코미디 작가로 일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농담을 만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완성된 농담에 가시가 돋아나 있는 걸 발견한다. 그러면 해당 표현을 걷어내거나 혹은 회의와 장고를 거쳐 아예 새로운 농담을 주섬주섬 만들기도 한다. 하, 웃음은 고행길이다. 누군가를 웃기기 위한 농담 하나를 만드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다. 대다수가 웃고 있지만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그것이 설령 의도치 않았더라도, 우리 창작자들은 치명타를 입는다. 그래서 검수, 또 검수해야만 한다. 방망이를 깎듯, 가시를 걸러낸다. 이것이 바로 창작자의 불편함에 대한 당연한 태도이니까.


따라서 나는 불편함에 대해 양가적이다. 어떤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불편함을 거슬려 하기도 한다. 전자는 '평상시의 나'일 것이고, 후자는 '방송작가로서의 나'일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누군가를 보며 '어떻게 저런 불편한 말을'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만든 농담에 불편해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이게 뭐가 불편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역시 나는 농담처럼 모순적인 사람인 것 같다.


이처럼 양쪽에 걸쳐진 나는 불편함과의 불편한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말을 과하게 뱉는 사람들과 과하게 봉쇄하는 사람들. 어디서나 극단적인 사람들은 늘 있다. 그들은 늘 화가 나 있으며 서로를 혐오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부추긴다. 그야말로 작금은 분노를 권하는 사회다. 나는 이 민감한 영역 속에 발을 걸친 채 고독과 자책을 겪으며 정답을 찾고 있다. 아니다, 어쩌면 불편함을 아예 없애겠다는 생각이 그릇된 걸지도 모르겠다. 불편함 없이 편하게 살려는 것 자체가 욕심인 것 같기도 하다. 


코미디 작가인 나는 자유롭게 농담을 만들고 싶고, 엄마 없는 나는 암 걸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코미디 작가인 나는 가끔 불편함을 듣기 싫어하고, 엄마 없는 나는 가끔 불편함을 들어줬음 한다.


여전히 나는 혼란스럽다. '확찐자'나 '식폭행' 같은 예능자막을 보며 누군가는 센스 있다며 재미있어한다. 

그러면 나는 작가로서 '자막 잘 만들었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내 불편할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튀어나온다. 누가 정답일까? 나와 내가 안에서 막 싸운다. 마치 지킬앤하이드처럼. 편해지려 하고 동시에 불편해지려 한다. 자기 편한 밤이 되기는 글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잠이 오지 않는 밤은 정말이지, 암 걸릴 것 같은데. 어느덧 잠자리가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불편한 자세로 자야겠다. 꿈에서는 부디 불편함이 없는 편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만든 모든 농담에 불편함이 없기를, 내가 듣는 모든 말에 불편함이 없기를. 분노와 혐오는 없고 끝내주게 웃긴 농담만 남아있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분노의 병'에서 치유되기를. 꿈에서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기도한다. 꿈에서는 불편함이 없기를, 복잡한 마음이 편해지기를. 아, 마음이 편하기 위해 어떤 꿈을 꿔야 할지 갑자기 알 것 같다. 꿈에서는 편한 세상이 오기를. 그래, 서울의 강남 노른자 땅 위에 있는 '이 편한 세상' 아파트를 내가 갖고 있기를! 아아, 진정한 이 편한 세상! 어느덧 잠자리가 편해져 간다.

이전 03화 엄마 없는 농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