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람은 무슨 색이었어?

아들의 스윗한 대답. 크지 마오. 아들아!

by 책닮녀

'맘클리' 라는 고전을 읽는 독서모임에서 '어린 왕자'를 읽고 있다. 살면서 숱하게 들어본 어린 왕자라는 책 제목이지만, 어린 왕자가 작은 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끝까지 완독을 해보지 못했다. 누군가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면 모자 모양을 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첫 번째 챕터에 나오는 얘기라 늘 읽다만 제게 유일하게 각인된 부분이지요) 이야기를 하면서 알은체를 했다. 괜히 무식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어린 왕자를 끝까지 읽지 못한 건, 너무 어려워서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갑자기 바오밥 나무와 가로등 켜는 사람은 왜 나오는 것이며, 장미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그런 것 따위 찾지 말고 그냥 읽으라고 작가의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내 생각이 중요한 거라고 혹자는 말하겠지만, 어린 왕자 책은 그 내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했을까 묻고 물어도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끊임없이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아하! 휴~ 하는 순간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책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맘클리라는 모임을 통해 함께 한다는 점이다. 나만 어려워하는 게 아니구나. 다들 어린 왕자쯤은 읽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들도 읽지 않았거나 나처럼 조금 읽고는 다 읽은 척했거나 아니면 읽었다 하더라도 모두 이해한 척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로 잡았던 어린 왕자 독서 기간은 2주일로 연장되었다. 모두들 조금 더 천천히 그 뜻을 음미하고 싶어 했다. 꾸역꾸역 시간에 쫓겨 보기보다는 유행 좀 아는 우리들이기에 '슬로 리딩'이란 걸 하고 싶었다.



그렇게 천천히 어린 왕자의 이야기에 스며들어가 우리는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 왕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만약 여러분이 새로 사귄 친구 얘기를 하면 어른들은 결코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 어른들은 여러분에게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친구도 나비를 수집하니?"라고는 절대로 묻는 법이 없다. 대신 "그 애는 몇 살이지? 형제는 몇 명이고?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이나 나가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라고 묻고서는 그걸로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생텍쥐페리/비룡소 p.23)



그러고 보니 우리는 숫자에 혹한다. 만나자마자 몇 살인지 나이부터 물어본다. 친구가 입고 온 예쁜 옷을 보면 이 옷의 어떤 점이 맘에 들어서 샀는지 물어보기보다는 얼마나 주고 샀는지를 물어본다. 친구의 아이는 학교에서 몇 등이나 하는지 궁금해하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보다는 하루에 몇 권이나 읽었는지에 집착한다. 숫자에 혹하고 숫자로 말하고 숫자로 판단한다.



맘클리 단톡방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에게 숫자와 관련 없는 질문을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면 좋겠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하는 숫자와 관련 없는 질문이라고는 오늘 밥은 맛있었어? 친구들과 별일 없었어? 정도인 나는 무슨 질문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톡이 올라왔다. '오늘 바람의 색깔은 어땠니?' 열린 질문은 이런 거구나. 숫자와 관계없는 질문을 어린 왕자가 한다면 이런 질문을 하겠지? 나는 얼른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오늘 바람의 색은 엄마 색이었어.




역시 아이는 아이다. 나는 상상도 못 한 대답을 한 아이의 말은 나를 순간 멈칫하게 만들었다. 무슨 뜻일까? 오늘 바람이 꽤 부는 날이었는데, 창가에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날이었는데, 엄마처럼 매서웠다는 뜻일까? 후~ 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오들오들 떨게 했다는 뜻일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짝 긴장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물으면서도 엄마 색이라는 게 상상이 안 되었다. 다만 예쁜 색이면 좋겠다고 보락색처럼 신비롭거나 노란색처럼 따뜻하거나 초록색처럼 편안하거나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나의 바람을 넘어섰다.



엄마처럼 포근한 색이었어.



방금 전까지 빨리빨리 3분 채워서 양치질하고, 10시인데 언제 잘 거냐며, 내일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날 거냐고 숫자를 앞세워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는데, 툭하고 던진 열린 질문은 아이도 나도 마음을 열게 했다. 엄마처럼 포근한 색이라고 말하니 포근하게 안아줄 수밖에. 포근한 바람을 조금 더 느끼게 해 줄 수밖에. 아들의 스윗한 대답을 들으며 '더 이상 크지 말아 다오 아들아~' 하고 잠깐 생각했다. 아주 잠깐(제발 커라~~ 제발 사람 좀 되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불러온다. 어린 왕자가 말하려고 했던 게 이런 거였을까? 숫자를 떼어놓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표현하려던 거였을까? 단위로 결정짓는 정확한 수치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질문, 대화가 우리 삶에 가득 차면 좋겠다. 그래서 고전을 읽고, 그래서 마음을 나누고, 그래서 질문하고, 그래서 답해본다.




오늘 바람은 무슨 색인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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