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일방적인 통보가 전해졌다. 사실 아이들이 그런대로 커서 남편의 손이 꼭 필요로 하는 나이는 지났다. 그럼에도 가장 바쁜, 집안일의 피크타임인 저녁시간에 도와줄 손 하나가 있다는 건 좋다. 꼭 일일이 시켜야지만 일을 하지만 또 시키면 일을 하는 사람이 남편이기에. 신기하게도 아이들도 아빠가 집에 있으면 둘이서 더 잘 논다. 나 홀로 설거지와 빨래 사이에서 밀당을 하고 있으면, 질투를 느끼며 설거지와 빨래를 제쳐두고 자신들과 놀아달라 할 때가 많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틀이나 내리 회식을 한다고 하니, 또 이틀 연속 회식을 하고 나면 하루는 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을 것이 뻔하니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집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한국 사회에서 회식 또한 직장 내 문화이고, 직장에서의 위치도 중요한 때이니 이해하며 넘어가는 수밖에.
어차피 정해진 회식을 바꿀 힘은 나에겐 없다. 오히려 이번 회식을 기회 삼아야 하니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나 토요일에 꼭 가고 싶은 북 토크가 있는데, 서울이라서 좀 걸려. 가도 되지?"
며칠 회식 투어를 할 예정인 남편은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뜻뜨미지근하게 '멀리서도 하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했다. 회식이 지나고 나서 이야기하면 나는 모르쇠로 바뀔 게 분명하니까 얼른 못을 박았다. 토요일 2시에 나가야 하겠노라고. 그렇게 힘들게 눈치작전으로 얻어 낸 소중한 나의 시간을 오늘 즐기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있는 도중, 시간이 지나 어제가 되어버린, 토요일 오후 2시 합정역 교보문고에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내 이름을 찾기로 했다> 작가의 북 토크가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보는 일이 내 일이라고 당연스레 생각하며 지내온 나에게 이 책을 만난 순간, 새가 지저귀는 종소리가 들렸었다. 아,,, 주부도 직업이니까 나도 워라벨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나도 퇴근이란 게 있는 거구나... 직업란에 버젓이 전업주부라고 쓰면서도 세상에 나아가면 직업이 없는 '무직, 경단녀'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 사회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란 걸 깨우쳐 준 책. 직업란에 버젓이 쓸 게 있는데 무직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사실인가.
오늘 이 북 토크에 가기 위해서도 나는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것들을 하는데에 주부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일과 관련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회식과 사적인 자리까지 당연히 인정받는 사회가 조금은 서글펐다. 물론 모든 여자가 불공평한 구조에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기를. 남자들이 꼭 하고 싶은 일만 하며 경제활동을 하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걸 나도 남편을 보며 느끼고 있으니까, 하기 싫은 일도 참아가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사회적 지위와 인정이 동반되는 경제활동에 반해 주부들의 가정 내 활동은 그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서글펐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고개가 아플 만큼 끄덕여졌나 보다.
작가를 만나고 보니 치열한 눈치작전으로라도 북 토크에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확고한 생각과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여성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라는 '페미니즘'이라는 아직은 외면하고 싶은 무거운 단어로 이 책을 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나'라는 사람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깊이 공부해 보지 않아 페미니즘은 잘 모르겠고, 주부들도 자신의 이름을 찾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내 이름으로 찾고 싶어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누구누구 맘, 누구누구 와이프 말고 출석부에 버젓이 적혀있던 내 이름 말이다.
주부라는 역할에 예부터 입혀놓은 무거운 갑옷을 이 삼복더위에도 벗지 못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언제인지를 꼭 생각해보기를. 가정을 모르쇠하고 등지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 속에 있는 다른 가족들만 바라보지 말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깊은 눈으로 관찰하고 헤아리고 안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이의 순간이 한 번밖에 없다고들 많이들 말하세요. 하지만 그 아이와 함께 하는 엄마의 인생도 그때 그 순간이 한 번밖에 없다는 걸, 많은 주부들이, 여성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북 토크에서 작가가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마디였다.
그래, 내 인생의 이 순간도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오늘(음, 그러니까 어제)서른 끝자락 어디쯤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소중한 시간 덕분에, 나는 더 빛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처음 만나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할 수 있어서 노을처럼 아름답게 물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