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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ul 30. 2021

하루의 외박이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내 인생의 일탈

젝키 짱! 젝키 짱!

불타오르던 덕후의 시절.

나는 어릴 적 젝키의 팬이었다. 1집 <폼생폼사>를 시작으로 나는 우리 오빠들에게 푹 빠져버렸다. 당시 나의 나이는 13살. 그렇게 시작된 노랭이의 여정은 중학생이 되어 절정을 맞이했다.

    

부산에 살고 있었기에, 음악방송을 직관하러 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팬들은, 오빠들의 집 앞에서 밤새 기다렸다가 오빠의 어머니가 (미래의 시어머니라고 지칭했었지;;;) 천사처럼 따뜻한 손길로 간식을 나눠주었다는 부러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도 딱 한 번만 해봤으면.. 간절한 맘이 들었다. 지만, 엄하고 보수적인 아버지께 공연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말조차도 꺼내지 못했다. 팬클럽 가입도 부모님께서 반대하셔서 그저 바라만 볼뿐, 정식 팬클럽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2000년이 되었고, 내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둥, 젝스키스 전격 해체.


회사의 입장과 멤버들 간의 의견이 다르기도 했고 각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음악과 활동을 하고파 내린 결정.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그만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결론을 지었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오빠들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존중받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들의 노래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학업도 뒤로하고, 밥도 먹지 않았다. 이제와 밝히는 바이지만, 엄마가 정성스레 싸주셨던 도시락을 고스란히 버리고는, 점심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젝키의 노래만 들었더랬다.

 

그러던 중 한 번도 직접 마주하지 못했던 오빠들의 무대가 한이 되었던 나에게 마지막 찬스가 들려왔다. 마지막 은퇴 무대를 드림콘서트에서 할 예정. 부모님이 무서워 공식 팬클럽 활동도 못하고, 단 한 번의 무대도 직관하지 못한 나는 드림 콘서트가 간절했다. 마지막이 될 오빠들의 무대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뜨거운 온도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콘서트장을 채우는 함성에 나의 작은 육성을 보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놓칠 수 없었다. 아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건 꼭 가야 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팬클럽에서 공식 회원이 아니더라도 참가비만 내면 드림콘서트를 다녀올 왕복 차편을 제공해 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참가비를 어디서 구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의 신분에 갑자기 몇만 원을 구하려니 눈앞이 깜깜했다. 엄마에게 솔직히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외출금지를 당할까 봐,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까 봐,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해서는 안 될 일탈을 저질렀다.     

엄마의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건을 집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고이 쓴 편지를 놓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집을 뛰쳐나와 나는 은행으로 갔다.

그리곤 돈을 찾아, 드림콘서트가 열리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엄마의 통장에 손을 대고, 하룻밤의 가출을 감행한 내 일생일대 커다란 일탈이었다.


낮에 출발한 고속버스는 5시간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고, 오빠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공간을 나눈다는 사실에 내가 저지른 일은 까맣게 잊고 그저 두근두근 설레었다. 용돈을 모아 거금 2만 원을 들여 제작한 플래카드를 오빠들에게 잘 보이도록 높은 공간에 비치했다. 그리고, 노란 우비를 입고는 노란 풍선을 들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함께 노래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을 정도로 진심을 다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우리들의 마지막 시간이 끝이 나고, 이제는 다시 부산으로 떠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제야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기에, 편지를 쓰고 나온 게 전부였고, 공연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나니 11시가 되어 있었다. 그 시간에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했을 땐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워낙 보수적인 아빠라 친구 집에서 자는 것도 한 번도 못해 본 나로서는, 죽을 각오를 하고 떠난 여정이었다. 맘은 단단히 먹었지만, 막상 집으로 들어가려니 두려움이 나를 삼켜버릴 듯 커다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불은 꺼져있었고 집은 고요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일주일 넘게 투명인간으로 살았다.     


밥은 차려주지만 절대 말을 섞지 않는 빈틈을 주지 않는 엄마, 눈도 마주치지 않는 아빠, 그리고 아무 말 없는 언니.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당연한 벌이었지만, 그때는 차라리 실컷 혼나고, 몇 대 맞고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옥의 시간이었다. ‘무플이 무섭구나’를 몸소 느껴본 짜릿한 일탈의 대가였다.   



    

그림책 『노랑이들』(조혜란/사계절)을 펼치며 나의 일탈이 떠올랐다. 어린아이들은 노란 버스를 타고 산과 들로 나간다. 사그락 소리가 나는 벼가 익어가는 곳, 그곳에 메뚜기가 함께 놀자고 손짓한다. 벼 위에서 뒹굴며 한바탕 신나게 노는 아이들.

작가는 자신의 어린시절 잘 익은 벼가 있는 논을 보면 기분이 좋아서, 한번 쯤 방방 뛰며 놀아보곤 싶었다고 한다. 귀한 식량 위에서 뛰어노는 일탈, 금기를 어기는 일을 그림책 속에서 한바탕 즐기며, 작은 일탈의 행복함을 선물해주고 싶었던것 같다.



그래, 나도 노란 우비를 입고, 옐로우 키스가 되어 젝키 짱을 외치던, 우리 집의 금기를 어기고 뛰쳐나가 나만의 짜릿한 일탈을 즐기던 때가 있었지. 머릿속 사진첩이 휘리릭 스쳤다. 무모한 일탈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보았기에, 이제는 터무니없는 일탈이 아닌 나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탈을 찾는다.

     

멈춰 서서 하늘과 1일 1 눈 맞춤해보기,
혼자만의 공간에서 비트에 몸을 맡겨보기,
자전거 타며 시원하게 콧구멍 샤워시켜주기,
울적한 날엔 몬드리안에 대적할 추상화 그려보기,
저 밑바닥 이야기를 글로 끄적여보기.

     

『노랑이들』 그림책 속 아이들이 일탈을 느꼈던 그곳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작가의 그림에서 말하 듯 일탈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거창하고 대담한 일만 일탈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뒤로 잠깐 물러나,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또다시 걸어 나갈 힘을 비축하는 것. 그게 일탈 아닐까?


나의 어벤저스 급 일탈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투명인간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힘든 대가였지만, 후회는 없다. 그 시간들이 지금의 작은 일탈을 더욱 소중히 만들어 주었으니까!


오늘도 작지만 확실한

그래서 더 정겨운 나만의 일탈로

나의 하루를 시작해본다.

이렇게 글을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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