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닮녀 Nov 20. 2022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보아요.

어제보았지만 오랜만에 쓰는 편지

언니, 어제 집에 잘 들어갔죠? 언니에게 편지를 쓰며 이런 인사를 할 날이 올 줄이야. 역시 꿈을 꿔야 이루어지나 봐요. 언니가 살고 있는 전라남도 광주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어요. 그야말로 저는 경상도 여자였고, 전라도 여행은 손꼽힐 정도로 몇 번 안 가봤으며, 더구나 광주는 특별히 관광도시도 아니었으니까요. 어제 택시를 타고 광주 시내를 지나며 KIA 홈구장을 보며 어머! 가보고 싶다 생각했었고, 해태 공장을 보며 신기해하고, 코카콜라가 담기지 않은 빈 병이 하늘을 찌를 듯 쌓아져 있는 코카콜라 공장을 보면서 우와를 남발했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의 공간에 가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온라인 세상에서 인연을 맺고 오프라인 세상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언니가 했던 '광주 한번 와'라는 그 말에 혼자 다짐을 했었어요. 올해 안에 반드시 가겠다고요. 제가 또 마음을 먹으면 합니다. 마음을 잘 안 먹어서 문제지만요. 남편과 아이들을 구슬려 주말 하루 시간을 내서 광주로 떠나게 되었어요. 이동시간만 7시간, 만난 시간은 비록 4시간이 채 안되지만, 역시 가길 잘했더군요. 4시간 동안 우리는 어제 만난 사이처럼 농담을 주고받고,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과거를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고, 미래를 꿈꾸었지요.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 있지요.(아니 여러 개일지도 모르지만) 간절히 원하는 걸, 손에 쥐려고 용을 쓰던 걸 스르르 놓아주었던 경험, 그래서 실패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경험. 언니도 말했지만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매일 울기만 했다고요. 그것과 관련된 단어만 나와도 펑펑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요. 저는 그 단어를 아예 귀에 담지도, 눈에 담지도 않았어요. 매일 보던 신문도 방송도 보지 않고 실패하지 않은 척, 나는 내가 싫어서 그만둔 척하며 살았어요. 누군가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도 못 들은 척하곤 했어요. 바쁘다고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기도 했어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저는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그건 실패가 아니었고, 경험이었다는 걸요. 내 인생의 과정의 일부였다는 걸요. 또 좋지 않았던 기억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게 좋은 기억이 되어 있다는 걸요.



만약 제가 그런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언니와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그때의 공허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 실패가 인생의 모든 지혜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요.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나의 아픈 흔적들을 외면하지 않으면 살면 좋겠어요.




『기억의 숲을 지나』                                                        (리이징 지음/김세실 옮김/나는별)

그림책 『기억의 숲을 지나』에서 한 아이는 길을 잃고 헤매요. 그때 공허라는 존재가 나타나 동행을 하죠. 그리곤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찾아갑니다. 아프지만 소중했던 기억들을요. 그 기억들을 담았더니 아이의 앞으로 길이 밝혀지고, 이제 더 이상 공허 없이도 혼자 나아갈 수 있게 되지요.



날 좀 보렴!
넌 이제 텅 비어 있지 않아.
우리가 찾은
기억의 조각들로 꽉 차 있어.
이 조각들 하나하나가 모여
 네가 된 거야.



예전에 누군가 저에게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내가 미래지향적이지 않고 과거에 여전히 머물러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과거에 머물러 나의 과거를 부정할 때는 오히려 말하지 못했어요. 그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 둘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때, 비로소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또 이제는 간절한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의 과거 덕분에 조금은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과거 이야기를 더 계속하고 싶은지도 몰라요. 제가 깨달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서요.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서 내가 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팠던 일들도 시간이 흐른 뒤 꺼내어 보라고요. 그때 꺼끌 거리던 조각의 단면이 조금은 매끈해져 있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어제 언니와 기억의 숲을 거닐며 내 안에 가득 찬 용기와 희망, 그리고 열정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어요. 비록 시간이 너무 짧아서 더 많은 조각을 맞추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요. 음 그러니까 언니, 우리 더 많은 시간 기억의 숲을 함께 거닐기 위해서, 더 많은 조각들을 공허라는 존재에 채워주기 위해서 다음번에는 중간에서 만날까요? 하하하 언니가 저희 동네에 와도 좋고요.




혹시 언니도 길을 걷다 잠깐 막막하거나 답답할 때가 있다면 저와 함께 했던 광주에서의 4시간을 떠올려 보아요. 어제 함께 했던 시간이 언니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답장 기다릴게요.








<육 센치 여섯 살> 프로젝트

키는 육 센치 나이는 여섯 살 차이 두 여자. 마흔이 넘어 인생을 조금 알게 된 육 센치 작고 여섯 살 많은 언니와 인생을 좀 안다는 나이 마흔이 되기를 갈망하는 육 센치는 크고 여섯 살 적은 동생이 책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습니다. 언니는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동생은 그림책 활동가로 살아갑니다. 책을 매개로 삶을 성찰하고 글을 쓰며 마음을 나눠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기 싫은 당신에게 모성애를 권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