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쩌다 OO'이라는 말, 많이들 쓰지요. 어쩌다 어른, 어쩌다 엄마, 어쩌다 사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역할을 많이 하고 있더군요. 실은 저도 어쩌다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솜사탕 같은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꿈을 맛보기 위해, 열심히 나무 막대를 돌렸지요. 하지만 입에 넣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버렸습니다. 한 줌의 가루만 남은 영혼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습니다. 영혼까지 사라져 가던 저에게 따뜻한 꿀물 한 잔을 건네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맞아요. 현재의 남편입니다. 그는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리고 힘들어하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가 다 해줄게~ 넌 옆에만 있어"라고요. 그렇게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만났지요. 저는 '사랑'이라는 인생 최고의 섬으로 도피를 했을 뿐인데, 어쩌다 유부녀, 어쩌다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엄마가 되고 보니 인생의 의미 따위는 사치요, 나의 존재 찾기 따위는 명품백보다 갖기 어려운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육아 고민 이외에는 어떤 고민도 제 맘속에 머무르지 못했어요. 어느덧 육아 10년 차에 접어들어서야 나를 위한 마음의 방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기도 하고, 옆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요, 나아가 앞을 내다볼 작은 여유가 생겼답니다.
어쩌다 얻은 캐릭터를 지켜내느라 버틴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더 의미 있게 꾸리고 싶었습니다. 어쩌다가 아니라 내가 간절히 원하는 캐릭터를 갖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그리고 잊고 살았던 마음속의 질문이 자꾸 저를 찾아와 두드렸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복잡했습니다.
나는 딸인가, 며느리인가, 엄마인가, 여자인가... 도대체 어디에 집중을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공부를 해보고 싶은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고 싶은가? 다시 경력을 쌓고 싶은가?
가정을 위해 내 몸을 내어주고 싶은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가? 셀럽이 되고 싶은가?
그렇게 많은 질문과 고민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헤매었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명확하지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생각들은 더 엉켜갈 뿐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고민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 것은 글을 쓰면서부터 였습니다.
글쓰기의 기본은 나를 들여다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의 내면 아이, 어린 시절, 가족, 친구, 지나간 사랑들, 그리고 흩어져버린 옛 꿈들... 이렇게도 많은 나를 마주하다 보니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조금은 알겠더군요.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내가 누구인지 천천히 곱씹어 보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어떠한 주제를 마주하더라도 모든 것은 나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드라마의 명장면, 골목길의 풍경, 여행의 묘미, 오늘의 날씨 같은 평범한 주제들도 결국 글을 쓰려면 나를 관통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본 장면과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버무려져 나만의 맛을 가진 글이 탄생합니다.
거창한 글쓰기가 어렵다면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글로 써보세요. 매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틈틈이 일기를 쓰다 보면, 내가 꽂혀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의 아이만큼 사랑하고,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쿵쾅 뛰는 무언가가 반복해서 나타날 거예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찾는 나만의 키워드가 등장할 겁니다.
2021년 3월 17일
어느새 봄이 오나보다. 이번 겨울은 눈이 지겹도록 내렸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반가운 봄이다. 혹시나 얼어붙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나무눈으로 살포시 덮고 있던 푸른 잎은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푸르른 생명이 여기 꿈틀거리고 있음을, 역동의 계절 봄이 왔음을 알린다.
초록 무성한 잎이 넘실대는 계절이 오면 언젠가는 흰 눈이 그리워지겠지? 흰 눈이 그리워지는 날은 하얀 쌀밥을 바라보며 눈 쌓인 지붕을 떠올려야겠다. 그림책 흰 눈을 펼치며 잠시나마 하얀 눈 꽃을 만끽해야 하겠다.
봄이 오는 3월의 어느 날, 나의 눈을 관통한 장면을, 그때의 마음의 동요를 기록해둔 글입니다. 계절이 오가는 게 반갑고, 살아 숨 쉬는 게 감사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림책으로 소통하고 싶은 내가 담겨있는 글입니다.
매일 무심코 지나쳤던 찰나를 짧은 문장으로 써보세요. 내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무엇을 볼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지를 문장에서 찾아보세요.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문제도 글을 쓰다보면 간단 명료해 집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코끝을 자극했던 냄새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심장의 비트를 두둠칫 하게 만드는 그것은 무엇인가요?
어쩌다 OO말고,
마침내 OO이 되기위해
오늘도 한 문장 기록해 보세요.
진짜 나 찾기라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를
가장 간단하게 풀어줄 세상 쉬운 방법은
바로 글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