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운전을 하는 아빠는 끼니때가 늘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점심을 놓치고 일을 하다가 손님의 목적지가 집 근처가 되면, 식당에서도 잠깐 쉬어간다는 브레이크 타임에 집에 오게 되더라도 밥을 달라고 하셨다. 엄마는 어떤 브레이크 타임에 그런 요구를 받아도 아무 말 없이 척척 상을 차렸다. 언니와 내가 모두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엄마는 늘 아침을 차려주셨다. 우리 집 식단은 쟁여놓고 먹는 음식보다는 한번 먹을 수 있는 만큼만 해 먹는 메뉴로 구성되었다. 이를 테면 생선조림, 된장찌개, 김치찜 등을 커다란 냄비 가득 해 놓았다가 먹고 또 먹고 하는 게 아니라 딱 한 끼 먹을 만큼만 해서 정말 딱 한 끼만 먹는 다소 번거로운 시스템이었다.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아빠의 짧은 입에서 비롯된 식단 형태였다. 엄마는 매끼마다 재료를 썰고 양념통을 꺼내며 도마를 설거지하는 식사를 차리면서도, 어떤 불만도 없이 척척 해냈다. 고등학생 때는 아침마다 종류만 바뀔 뿐 맵고 달고 짭짤한 생선조림이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왔다. 그런 엄마를 보며 그 당시에는 그다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결혼한 여성이라면 자녀를 둔 여성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엄마는 갖가지 바깥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적인 아빠와 순종적인 엄마 밑에서 커온 덕분인지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조금 껄끄러웠다. 내 주변에 두고 싶지 않은 단어 같아서 외면했다. 여성의 권리를 앞세워가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기혼여성이라면 아이를 당연히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명절에는 시댁에 가야 하고 제사는 대대로 이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당연하다고 여겨온 개뼉다구 뜯어먹는 소신은 결혼과 육아를 거치며 내 안의 미친년을 자주 소환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욕망을 쉽게 드러낼 수 없었다.
<나를 키운 여자>(홍현진 지음, 느린 서재)라는 책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세밀한 금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던 나의 정신적 바탕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져 주었다. 욕망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엄마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공간을 마련하며 쉼 없이 달렸던 작가는 도저히 더 이상은 쥐어짤 수 없는 번아웃을 경험하고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쉼을 갖는다. 그 휴식 동안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들의 욕망을 마주하며 자신의 욕망도 조금씩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여성은 이래야지'라는 그 개뼉다구 같은 논리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성장했다. 책 속에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 속 그녀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만나게 해 준 홍현진 작가와 그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느린서재 출판사, 그녀들이 나를 한 뼘 키웠다. 실제로 만나면 한 뼘 큰 키가 이거냐며 깜짝 놀라겠지만 내 마음속, 생각 속에서는 나는 이미 장신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p.148 일과 육아 모두 완벽히 해내는 슈퍼맘이 되지 못한 여성은 육아보다 일이 중요한 '독한 년'이 되거나, 남편 돈으로 애나 키우는 '팔자 좋은 년'이 된다. 여성의 삶을 납작하게 후려치는 여성 혐오 속에서 여성이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숱한 고민과 어려움은 말끔히 거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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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에서 사회학자 오찬호는 말한다. '단언컨대 모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단어'라고. 결혼한 여성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좋은 엄마'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엄마'가 된다.
나는 사라지고 아이만 남은 삶. 자연스레 엄마는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집착하게 된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니 보상 심리가 생길 수밖에.
p.282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내가 희생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엄마니까 커리어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안정적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그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임신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평등한 관계를 중시하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미스터리이지만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부지불식간에 새겨진 모성 이데올로기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참 이상한 말을 많이 들었다. 오전에 브런치카페에서 지인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여성을 보며 혀를 찬다. 남편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비위를 맞추어 가며 코 묻은 돈을 벌어오는데, 그 돈으로 비싼 브런치를 사 먹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다고. 아이를 돌보며 집에 있지만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아이가 다치게 된다면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엄마라는 말과 모든 원망이 돌아온다. 남편이 그런 경우에는 익숙지 않아서라며 옹호의 목소리가 더 큰데 말이다. 집에 있지만 아이를 보며 집안일을 하는 게 버거워 시판 이유식이라도 주문하면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여성으로 단정 짓는다. 아이를 보다가 힘들어 게임에 현질을 하는 아빠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는 말을 하면서.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너무나도 멀고 험하고, 나쁜 엄마가 되는 길은 가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상한 구조다. 남성에게는 그렇게 빡빡한 잣대를 들이밀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실제로 남성이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하면 대단하다, 세심하다 같은 좋은 단어들이 수식어로 붙는다.
붕괴된 틈으로 빠져나와 마구 나대는 내 안의 미친년을 나도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욕망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아직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내 옆에 나란히 놓기가 조금 겁이 났다. 왜냐면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아서다. 머릿속에서는 왜 며느리만 설거지를 해야 할까, 남편도 하면 안 될까? 시켜보니 엄청 잘하던데, 만두를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은 남편과 시아버지인데 왜 여자만 빚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지만, 시집에서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내 아들에게 제사를 물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시어머님이 굳이 제사를 원한다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 저떻게 합치고 보태어 지내야겠지(?)하며 체념한다는 점. 저녁 시간에 줌 모임을 갖게 되면 남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케어해 달라고(이미 다 커서 봐줄 것도 별다르게 없는 아이들인데도) 여전히 부탁한다는 점. 갈등 상황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 일을 뚫고 나가는 게 버겁다. 그래서 이 모든 아이러니함에 화가 나고 짜증이 솟구쳐도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한다. 그런 나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기댈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변하고 있고, 성장해가고 있음은 틀림없다고. 그러니 내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도 된다고. 이 책의 작가처럼 남편과 시댁과 맞서가며 내 권리를 찾는 것은 나에게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이 생각을 꼿꼿이 세우고, 이 세습이 더 이상 대물림 되지 않게 애를 쓸 것만큼은 확실하다. 언젠가 내가 시어머니가 될지 안 될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만약 된다면 홍현진 작가가 명절을 지내는 형태처럼 설에는 시댁에, 추석에는 친정에 다녀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생각으로부터 변하는 작은 변화를 일구어 나가려고 한다. 내 안의 미친년이 서서히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나를 키운 여자들>로 만난, 나를 키운 수많은 여자들을 기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