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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Oct 24. 2023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

다시는 오지 않기를, 부디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기간이었다. 공부한답시고 학원에 삼삼오오 모여서는 자율학습을 하고 밤늦게 귀가를 하곤 했다. 며칠 째 늦어진 나의 귀가시간 덕분에 엄마의 취침시간도 자연스레 늦어졌다. 내가 안전하게 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간식을 챙겨주고 다음 날 필요한 것을 신경 써주는 엄마의 삶은 고단했다. 


시험의 막바지에 다다랐던 어느 날 밤, 집 앞에 도착하니 12시 즈음이었다. 잠이 든 가족들이 깰까 봐 벨을 누르지 않고 열쇠를 열고 들어갔다. 평소에는 다른 가족들은 잠들어 있어도 엄마는 깨어 있었는데, 나를 맞이한 건 깜깜한 어둠 속 휘황찬란한 TV 연속극 화면이었다. 엄마는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 상태였다. 시험기간을 겪고 있는 나만큼 피곤해 보이는 엄마를 깨우지 않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는 살금살금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조용히 문을 열었을 때, 그제야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니 누고?"


때 마침 TV화면에서는 붉게 물든 노을 진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고, 엄마의 얼굴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눈썹과 머리는 화가 난 모습이었고, 자다 깬 목소리는 저 세상에 살고 있는 검은 사자도 깜짝 놀랄 만큼 걸걸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 현정인데"

설마 이제는 모른 척하지 않겠지 생각했다. 잠결이라 그런 거라고. 하지만 엄마의 다음 대답은.

"현정이라고?" 

였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엄마는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하마터면 엄마가 무서워서 다른 가족을 깨울 뻔, 아니 다시 집을 나갈 뻔했다. 다음 날 엄마는 내게 와서 어제 언제 들어왔냐고 물었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엄마가 몇 시간 만에 다시 귀엽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잠에 취해 일어났던 우리 집 비몽사몽 괴담은 아직도 설, 추석이 되면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여러 사람의 몸짓으로 패러디되곤 한다.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엄마가 나를 못 알아보는 그때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하하 호호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가끔은 그 추억이 현실로 다가올 까봐 두려울 때가 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언젠가 엄마가 나를 잊어버리면, 그래서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하는 무서움. 내가 아는 인생의 가장 무서운 명장면이 연속극이 아닌 단막극으로, 더 이상 내 삶의 드라마에서는 플레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웃는 추억으로 남아주기를. 엄마가 오래오래 영원히 나를 기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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