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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Oct 27. 2023

잘 지내니

나의 유령친구에게

이상하게도 넌 비 오는 날만 나를 찾아오더라.

비 오는 날 알록달록한 옷을 입어야 잘 보인다는데 맨날 그렇게 까만 옷만 입고 다니면 어떡하냐고 내게 와서 잔소리를 했어. 그래놓고선 너도 맨날 하얀 옷만 입고 다녔잖아. 너는 내가 건물에 잠깐 들어갔다 온 사이 내 우산을 숨겨놓고는 같이 비를 맞자고 졸라댔어. 내가 하얀 옷에 비 맞으면 속옷 다 비친다고 얼른 우산 쓰라고 소리 지르면, 널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괜찮다고 시스루패션으로 춤을 췄어. 너의 그런 애교에 못 이긴 척, 차가운 빗속으로 뛰어들곤 했지. 


그래도 그날은 너무 했어. 정말이지 그날은 비를 맞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Y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탄 날 너는 어김없이 내 우산을 숨겼어. 우산이 없어진 걸 알고는 내가 하지 말라고 너에게 눈빛을 보내니까, 내게도 몸을 숨기고는 소리만 냈지. 비를 맞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같이 놀자고. 너랑 뛰어놀 기분이 아니었는데 마구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할 수 없어 그냥 걸었어.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됐지. 근데 네가 그 빗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거 이제 생각하니까 고맙더라고. 눈물을 어디서 터뜨려야 할지 몰라 울음주머니를 쥐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내 속을 들여다본 건지, 네 덕분에 지긋지긋한 사랑을 빗속에 흘려보냈어. 그러고 몇 날 며칠을 아프니까 좀 살 것 같더라고.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비가 와도 네가 오지 않기 시작했어. 네가 왔는데도 내가 모른 척했던 건지, 네가 왔으면서도 나를 모른 척했던 건지. 네가 없으니까 혼자 비를 맞을 용기가 나지 않았어. 우산이 없어도 너만 있으면 괜찮았거든. 네가 보이지 않고부터는 갑자기 비가 내리면 편의점에 가서 꼭 우산을 샀어. 혼자 비를 맞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아니, 네가 없이 비를 맞았는데도 좋으면 그럼 너를 영영 잊어버릴 거 같아서.


다음 주엔 비소식이 있더라. 네 시스루 패션에 어울릴만한 시스루 비옷을 준비해 놓을게. 나이 들어서 비 맞고 아프면 잘 낫지도 않으니까, 이제 비옷 하나 즘 걸쳐도 좀 봐줘. 네가 제일 좋아하던 물웅덩이 멀리뛰기도 같이 해 줄게. 비가 많이 오면 같이 펑펑 울어줄게. 빗속에서 신나는 춤도 출게. 


와 줄거지?

나의 유령친구 슬픔이, 널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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