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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Mar 19. 2024

바람아 멈추지 마오

있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

아침부터 분주했다. 뿌리를 단단히 말리고 롤을 둘둘 말았다. 헤어도 헤어지만 메이크업은 시간과 정성을 얼마나 들이느냐에 따라 정말 다르기에 스킨부터 기초공사를 다져나갔다. 메이크업은 5분 컷, 드라이 역시 5분 컷으로 끝나는 나의 외출준비가 오늘만큼은 달랐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잠깐 스쳤던 그 힘줄남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이곳저곳 톡톡 펴 바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평소 드라이 실력이 영 꽝인 나는 다음 주 주말 언니 대신 엄마 가게를 돕기로 하고 언니의 비싼 미용기구를 빌렸다. 이렇게도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라서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쳐질 때로 쳐진 50대의 머리를 20대의 윤기와 볼륨을 머금은 머리로 만들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족스러웠다. 



뿌리 볼륨에 한껏 신경 써서 살려놓고는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타고난 직모인 터라 비바람이라도 맞닥뜨리면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머리를 마주하게 되기에 무엇보다도 바람을 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소개팅하는 날이면 콜택시를 불러 바로 건물에 들어가거나 집 앞 지하철을 이용해 지하철 역과 연결된 건물을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힘줄남이 결혼식 때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둘레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고 하길래, 나도 좋아한다고 입에 침만 바르고 거짓말을 해버린 탓에 만남은 야외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걷는 건 딱 질색인데,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는 걸 실감했다.

  


하는 수 없이 21세기에 들어오며 오히려 신문물이 되어버린 스프레이를 머리에 잔뜩 뿌려 어색한 볼륨을 유지한 채로 나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첩보영화를 찍듯 바람을 피해 다녔다. 웬만한 코스는 바람을 맞지 않고 가는 법을 이미 몸에 충분히 익히고 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공원 한가운데에 힘줄남이 서 있었다. 은근 내숭 모드를 장착하고 한발 내디뎠다. 그때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왔다.

"악. 미친. 이 바람 뭐냐고. 바람 따위 영영 사라져 버려!! "

속에서는 욕이 막 나오려는 찰나, 힘줄남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금만 더 바람이 공격을 가하면 스프레이로 고정해 놓은 머리가 더 어색하고 더 요란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복화술로 제발 바람 따위 사라져 버려라고 마구 외치는데 일순간 바람이 멈췄다. 그러더니 정말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럴 수도 있나 싶었는데 뭐 어찌 됐든 바람만 안 불면 되니까. 영영 이렇게 바람이 안 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힘줄남과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잘 지내셨죠? 오늘 날씨 너무 좋"

어색한 듯 심쿵한 안부를 물으며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줄남은 둘레길 중턱 산 어디 즈음에 가면 만나는 식당에서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잔하고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이렇게 천생연분일 수도 있구나. 걷는 건 싫어하지만 산기운 받은 막거리는 좋아하니까. 제정신에 둘레길 걷기엔 힘드니까. 그럴 땐 막걸리가 최고니까. 술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분위기 즐기러 어쩔 수 없이 가 본다는 표정의 내숭을 장착하고 뒤를 따랐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쨍한 햇볕 속에 걷다 보니 땀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더위가 더 가중되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나는 바람이 불지 않는 게 더 좋았다. 힘줄남의 셔츠를 적시는 땀도 오히려 더 섹시미를 가중시켰으니까. 그렇게 들숨날숨과 함께 걱다보니 막걸리 집에 도착했다. 조금만 마시려 했는데 바람도 없는, 덥고 더운 햇볕 때문에 벌컥벌컥 몇 사발을 들이켰다. 



충분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우리는 출발했다. 둘레길이라 평평했지만 구간구간 조금 좁은 길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앞장섰다. 화가 나 있는 힘줄을 가진 팔뚝으로 힘든 구간을 붙잡아주었다. 둘레길 중턱 즈음 갔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했다. 화장하느라 화장실은 제대로 보고 오지 못했는데, 덥다고 막걸리까지 들이켜댔으니 배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첫 만남은 정말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둘러봐도 화장실은 없고 티를 낼 수도 없어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를 되뇌이며. 화장실에 가고 싶은 배를 움켜 잡으니 계속 가스가 새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 이 좁은 산길에서 어떻게 소리라는 관문을 통과한다 해도 냄새 때문에 들통날 게 뻔했다. 점차 조여 오는 가스의 압박 때문에 나는 바람이 다시 불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제발, 바람아 불어줘. 아까 한말은 취소할게. 냄새보다는 사자가발이 나을테니까. 제발. 나 몇 년 만에 썸 타는 건데 바람아 불어줘.'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시큼 텁텁한 구린내가 확 몰려왔다. 나의 앞에 서 있는 그의 뒷 모습에서, 우락부락 화가 나 있던 그의 엉덩이 근육 그즈음 어디선가 냄새가 멈춰 있는 듯했다. 으악. 세상에 이런일이. 썸남 앞에서 내가 방귀를 뀌는 것도 싫지만 썸남의 방귀 냄새를 맡는 건 더 싫은데. 



내가 잘못했어.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줘.

제발, 바람아 불어줘.  






그림책으로 글쓰기 <그냥, 좋아서 씁니다> 7기의 첫 글쓰기 날입니다. 만약 바람이 불지 않으면....? 이라는 주제로 상상 글쓰기를 해 보았습니다. 조금은 더Love한 이야기지만 한번 쯤 겪어봤을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바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는 글쓰기였어요. 재미있고 다양한 글쓰기, 그림책으로 글쓰기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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