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큰 아이 담임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녹색 어머니 봉사를 하루 더 신청할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우리 학교는 아이 한 명당 녹색어머니 하루 봉사가 필수이며, 나처럼 1학년과 3학년에 두 자녀를 둔 경우에는 1년에 두 번은 필수로 봉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전체 학생 수가 적어지고 있는 추세라 두세 번씩 봉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분명히 거절하셔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게 세상 어려운 옛날 사람인 나는, 신랑에게 탄력근무를 하라는 엄포를 내리고는 이틀을 내리 녹색어머니로 활동했다.
우리 학교는 8차로의 커다란 사거리를 끼고 있어, 아이들이 등교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 많다. 때문에 녹색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자리빨'이 중요했다. 어떤 자리에 배정되느냐에 따라 그냥 수월하게 넘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운전자와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운전자와 싸움까지 할 일은 또 뭐가 있나 속으로 생각만 했었다. 아이가 3학년이니 녹색활동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동안은 명당자리에 운이 좋게 당첨되어 별문제 없이 봉사활동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 중 하루가 어려운 자리라고 손꼽히는 곳에 턱 하니 걸린 것이었다. 그곳이 어려운 이유는 신호등과 떨어져 건너는 횡단보도가 하나 더 있으며 그곳으로 많은 차들이 출근을 위해 우회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등교시간이 아닌 경우에도 사고가 잦은 곳이라, 늘 아이들을 데리고 건널 때도 주의를 기울이는 곳이었다.
봉사 날 아침 8시 20분 학교로 향했다.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조끼를 입고, '정지 STOP'라고 쓰여있는 깃발을 챙겨 들고 얼른 배정된 자리로 나갔다. 우리 집에서 등교하는 방향이 아니라,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다니는 줄 처음 알았다. 녹색어머니가 별 것 아니라고 여겼는데,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량의 신호등에 노란 불이 켜지면 나는 깃발을 내밀었다. 출근시간에 늦지 않게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급하게 정지하는 경우가 생겼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조금만 천천히 가주면 좋으련만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보행신호가 여전히 초록불이라 안전바를 거두지 않으면 운전자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아이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나는 신호에 맞추어 정지 깃발을 내밀었다 거두었다 했다. 그러던 중 초록불이 바뀌고 깃발을 내밀었는데, 한 외제차가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다가왔다.
'깃발을 치워야 할까? 이러다 부딪히면 어쩌지? 제발 멈추라고요!'
맘속으로 외치며 끝까지 깃발을 치우지 않았다. 코앞에서 하는 수 없이 브레이크를 밟는 운전자. 정말 이러다 사고가 나는구나 싶었다. 어이가 없어 운전자를 쳐다보는데, 아주 아무 일 없다는 듯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남자 운전자가 무섭기도 했고,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홀연히 떠나버렸다.
운전자가 떠나고 나는 내가 들고 있는 깃발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한글로 아주 큼지막하게 '안전'이라고 쓰여있고, 밑으로는 'STOP'이라고 영어로 적혀있다. 아무리 눈이 안 좋아도 운전을 할 여력이 된다면 훤히 보이고도 남을 글씨, 또 색깔은 어찌나 분명한지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면 누구나 알만한 표시다. 한글로 써줘도, 영어로 써줘도 모른다면 대체 어떻게 써놓아야 알아들을까? 불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이미 휑하고 가버린 그 남자에게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한마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