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서

보라빛 무스탕이 잘 어울리던 그녀

by 책닮녀

인디핑크 미니스커트에 롱부츠.

상의는 부들부들한 느낌의 아이보리 니트.

그 위로 걸친 연보라 무스탕이 까무잡잡한 피부를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연회색 베레모를 뒤로 살짝 걸친 모습이

단발머리에 딱 어울린다.

길게 뻗어 올린 속눈썹은

커다란 눈을 더 커 보이게 하고.

눈길을 끄는 화려한 치장 속 그녀의 얼굴 표정이

발길을 멈칫하게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떠나가는 기차와 들어오는 기차가 뒤섞여 있는 그곳, 맞이하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들이 분주한 그 공간, 플랫폼 한가운데 20대의 내가 서있다. 다소 과한 패션도 찰떡같이 소화해내던, 반짝반짝 스스로 빛을 내던 젊은 시절의 내가 서 있다. 패셔너블한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늘진 얼굴을 하고서.


몇 주전, 갑작스러운 비보로 혼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홀로 도착한 기차역에서 나는 예전의 나를 만났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힘에 겨워하는 나를, 혼자인 게 두려워서 망설이고 아파하던 나를.

외로움과 불안감을 감추고 입술을 굳게 깨물고, 씩씩한 걸음으로 기차로 올라서는 그녀에게서 지금의 내 모습이 또 겹쳐진다.


'그래, 그때 어렸었지. 열정, 그거 하나 빼면 시체였지. 그래, 열정.'


문득, 여전히 열정 빼면 가진 것이 하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먹여 살려야 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도 아니고,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렇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가 그리 힘들고 어렵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해도, 가시적인 무게가 덜 한 일이라고 해도 인생은 늘 어렵다. 그리고 힘이 든다. 어려우니 인생이겠지만 가끔은 숨이 턱턱 막혀 조여올 때가 있다. 자욱한 안개가 가는 길목마다 자리 잡고 있는 느낌. 신호등과 횡단보도는 고사하고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잡초 무성한 숲길을 내 손으로 쳐내고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느낌.


기차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본다. 깜깜한 터널 속을 지날 때면 창에는 나의 모습만이 덩그러니 비친다. 20대의 나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힘을 내라고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곤 했었다. 그때의 나의 열정에 슬며시 기대어 본다. 될 수 있다고, 하면 된다고 열정 넘치던 당시의 나를 소환해 본다. 그리고 그 열정에 10여 년의 세월을 버티어 낸 노련미도 보태어 본다.




생계유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 아님에 감사하며,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가며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꿈꿀 수 있고, 또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보자고. 그렇게 열정을 놓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보랏빛 무스탕을 입고 슬픈 얼굴 대신 엷은 미소를 띤 그녀를 마주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지쳐가는 나에게 작은 위로의 손길을 건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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