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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Mar 20. 2022

내일 메뉴는 너로 정했다. 밀면 한 그릇.

그림책『풍선』,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유년의 순간들

"선생님, 저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코앞에 닥쳐 발등에 불이 붙을 대로 붙은 때였다. 7교시 수업을 하기 전 나와 친구들은 쪼르륵 교무실로 달려갔다. 으흠. 으흠. 맘을 가다듬고 당당하게 걸어가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왜?"

매우 이성적인 나의 담임선생님은 어디 이유라도 들어보자며 아주 심플한 질문을 던졌다.

친구들과 나는 서로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나도 나름 모범생(매우 주관적인 기준입니다만 어찌 됐든 우등생이 아니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이었지만, 그 무리에서는 가장 덜 모범생이었기에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밀면 좀 먹고 올게요."

"......"

담임선생님은 내가 잘 못 들은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셨다. 이런 10대의 패기와 당돌함 보소. 밀면이라니.



당시 우리 학교는 공부를 많이 시키는 사립학교였고, 11시까지 원하는 사람에게 지원을 받아 야자를 했다. 말이 지원이지, 사실 예체능을 하는 아이들 빼고는 모두 의무였다. 그때의 나는 가정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곤 했다. 어차피 발등이 뜨겁다 못해 타 들어가는 고 3이었기에, 노는 것에 진심인 친구들도 공부를 시작하는 고3 여름이었기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쌓는 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이제야 흥미를 붙인(좀 많이 늦었죠? 18년 만에 생긴 흥미라니;;;)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고, 덕분에 늘 틀리던 문제를 맞히기라도 하면 신이 난 적도 있었다. 틈틈이 친구들과 뒷산 산책도 하고 재잘재잘 수다도 떨며 보내는 소중한 학교 생활 중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급식이었다.


노란 도시락에 배부되는 급식은 점심때 먹고 저녁에 또 먹을 때면, '왜 메뉴가 바뀌었는데도 똑같은 맛이 나지?' 하는 의문이 일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니,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공부를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과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었다. 좋은 것을 듣고, 맛난 것을 먹으면 공부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급식은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축이었다. 그래서인즉, 여름 방학 때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 먹었던 밀면이 너무너무 그리웠기에, 오늘은 급식을 패스하고 밀면을 먹고 오자며 친구들과 작당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공부가 더 잘 될 거라며.



어떻게 나갔다 올까 고민을 하다가, 병원을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할까 생각했지만 3명이 동시에 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녁시간 안에만 서둘러 들어온다면 이게 왜 못 나갈 이유가 되느냐는 의견이 나왔고, 선생님께 솔직히 말해보자는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상당히 이성적이셨던 담임 선생님을 설득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피식 웃으시더니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밀면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들며 필사적으로 설득하려고 애썼다. 첫째, 야자 시간에 전혀 관계없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둘째 학교로는 배달이 안되니 우리가 잠깐 다녀오는 것이 맞다. 셋째, 만약 지금 밀면을 먹지 않으면 야자시간 내내 밀면 생각밖에 나지 않아 오히려 공부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다.라는 주장. 살찐 목의 없는 핏대를 세울 정도로 강력하게 소리를 내보았지만, 선생님은 끝내 허락해주시지 않았다.(뭐 당연한 얘기죠? 지금 생각하면 참 허무맹랑합니다^^::)


어쩔 수 없이 교실로 돌아왔지만 역시 머릿속에는 오로지 밀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7교시 수업 내내 빨간 양념이 스며든 윤기가 사르르 도는 면발, 하양 노랑이 깔끔하게 어우러진 삶은 달걀의 단면, 살얼음이 둥둥떠다니는 그 장면만 둥둥 떠다녔다. 수학책을 펼쳐도, 국어문제집을 펼쳐도, 멀리 하늘을 보아도, 몇 시인지 시계를 확인해도 오로지 밀면만 풍선처럼 둥둥 떠다닐 뿐.



그래서 우리는 18년 인생 큰 결심을 하고, 몰래 나왔다. 선생님의 심부름을 간다며 경비 아저씨께 배짱 두둑한 거짓말을 하고서는 밀면집으로 냅다 향했다. 시내에 있는 밀면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기에 우리 동네에 위치한 밀면집으로 향했고, 이동하면서 전화로 주문을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이런 센스와 열의로 공부를 했으면 1등 했겠죠?)


그렇게 몇 분 만에 밀면을 순삭 하고, 다시 학교로 올라갔다. 막 야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우리는 빛의 속도로 제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정말 몇십 초 차이로 담임선생님은 순찰을 돌러 오셨고, 그 순간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있었다. 너무 뛰어와서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오는 밀면의 향기를 꾹꾹 눌러가며 태연한 척 공부를 했다. 아무런 낌새를 눈치 못 채셨는지, 아니면 모른 척해주셨는지 몰라도 우리의 일탈은 다행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장식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년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책 『풍선』을 보며 나는 그렇게 나의 숨 막히는 일탈기를 떠올렸다. 다섯손가락(동방신기는 리메이크입니다. 다섯손가락 알면서 모르는 척~ 나이를 속이지 마세요)의 노래 <풍선>을 그림책으로 담은 작품.



노란 풍선이 하늘을 날면 내 마음에도 아름다운 기억들이 생각나
...
왜 어른이 되면 잊어버리게 될까
조그맣던 아이 시절을



뭐가 그리 바쁜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요즘이다. 이 노래를 들으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엉뚱하고 제 멋대로였지만 나름 패기 있고, 결단력(?)도 있고, 신선함으로 통통 튀던 그때의 모습. 왜 어른이 되면 잊어버리게 되는지...  어른은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럴 때마다, 아니 그럴 때 일 수록 나는 그림책을 펼치고 내 마음을 돌보기 위해서 애를 써 본다.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수하게 살 수만은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어느 날, 어떤 날 가끔은 풍선을 불어 멀리 날려 보내고 싶다. 파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노란 동그라미 속을 상상하며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풍선 속에 밀면 한 그릇도 그려보고,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 친구들과의 뜨거운 우정도 그려보고, 꿈을 향해 오로지 직진만 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도 그려진다.



노랭노랭했던, 아지랑이 피어나던 나의 풋풋한 시절, 나는 나의 소중함을 찾아 꽤 잘 살았었구나.


노랑 풍선 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을 마음에 켠켠이 쌓아본다.

조금 딱딱하고 퍽퍽해진 지금의 삶을 말랑하고 촉촉하게 만들기 위해.

오늘만큼은 노랑 풍선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잊었던 꿈과 추억을 만나고 싶다.



그래, 내일은 밀면 배달시켜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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