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이번 생은 힘들까요?

11년 차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며

by 책닮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서울로 상경하여 처음 들어가게 된 직장이었다. 간절히 원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경력에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는 곳이었고, 3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만으로 서울의 물가를 감당해내는데 상당히 지쳐있었던 나는 마냥 좋았다. 또 짧은 순간이지만, 작은 곳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도 짜릿했으니까. 다시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설레는 맘으로 직장을 향했다. 방송국에서 직접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 교통을 모니터링을 하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된 나는 일반 직원들과 섞여 지내게 되었다.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뭐야? 기분 나쁘게. 내가 뭐 이상한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부터였다. 그 남자는 나의 담당자라는 핑계로 내가 있는 스튜디오에 시도 때도 없이 들어와서 나를 들었다 놨다 했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맘 하나 기댈 곳 없던 나를, 여유롭고 편안하고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인 양 보듬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훅 사랑에 빠졌고, 짜릿한 사내연애에 빠져 달콤한 나날을 지냈었다.(아... 사내연애로 이야기가 빠지면 19금을 달아야 할 것 같아,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상상에 맡길게요^^)



그 남자는 처음부터 내게 자신은 결혼을 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선포를 했었다. 결혼하지 않을 거면 시작도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 헤집어 놓고선 그런 말을 하니, 순수했던 20대 초반의 나는 고작 해본 거라곤 연애를 전제로 한 만남뿐이었던 나는 홀랑 넘어가 결혼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오디션을 수도 없이 떨어지기도 했기에, 나는 그 일을 그만 둘 핑계가 절실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런 고백이나 약속도 없이 우리는 정식으로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결혼을 전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시댁에서는 아들의 결혼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기에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셨다. 얼른 날을 잡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내게는 아직 시집을 안 간 3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지만, 그 언니가 아직 서른도 안 되었지만, 근데 나도 이 남자가 좋으니 엄마에게 나 먼저 가겠다고 선포를 했더랬다. 콩깍지가 씌었던 거지.



나의 부모님도 좋은 게 좋은 거라 큰 반대는 못하셨다. 멀찍이 잡아놓긴 했지만, 결혼 날짜가 정해졌으니 우리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더 알콩달콩 사랑을 꽃피웠다. 그러나 내게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결핍이 하나 있었으니, 도통 이 남자는 프러포즈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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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일날 선물 하나 하는 것도, 나를 직접 백화점에 데리고 가 필요한 것을 고르게 하는(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좋긴 합니다만^^) 완벽한 현실주의자인 지금의 남편이자 그때의 그 남자는 프러포즈는 생각도 않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낯간지러운 건 못 참는 사람이기에 좋으면 된 거고, 같이 살면 된 거고, 결혼하자고 했고, 오케이 했으니 결혼 준비 중인데 무슨 프러포즈냐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프러포즈는 받지 못한 채로 오늘로부터 11년 전, 나는 아빠 손을 잡고 들어갔다가 그 남자의 팔에 기대어 예식장을 나왔다.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 남자가 프러포즈 같은 건 평생 안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농담으로 프러포즈 안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금만 기다려봐. 다 준비하고 있어.'라는 대답이 나왔다.



오잉? 웬걸.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런 대답을 하니 혹시 신혼여행 가면 뭐가 있나..? 하고 잔뜩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11년이 지난 지금도 프러포즈를 기다리는 중이다. 가끔 다시 물어보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래도 여전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이야기하는 이 남자. 음.... 죽기 전에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년 결혼기념일이 되면 또 나도 모르게 은근슬쩍 기대를 하고 있겠지. 이번 생에 프러포즈는 포기해야 할까?



브런치라고 하면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만 떠올리는, 지금 옆에 누워 천진난만하게 자고 있는 그 남자가 이 글을 볼 확률은 내가 프러포즈를 받을 확률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우연찮게 한번 즈음 노출이 되어, 손가락이 두꺼워 잘못 누르는 바람에 보게 되어, 죽기 전에 프러포즈 한 번 받아보면 좋겠다.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여전히 '프러포즈는 나는 모르쇠' 하고있는 남편 대신, 통장에 있는 자신의 용돈으로 치킨과 맥주를 선물해 준 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역시 딸이 최고♡딸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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