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직동에 위치했던 큰아버지 집. 큰집이 있는 사직동은 늘 사람들이 붐볐다. 특히 봄이 되면 시끌시끌 꽹과리 소리도 들리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유는 바로 사직구장이 인근에 있어서였다. 지금이야 전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기는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었지만, 사실 그 당시에 롯데 자이언츠, 그러니까 부산은 야구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에게 내놓아도 지지 않는 열정이 있는 곳이었다. 야부심이라고나 할까?(물론 지금도 있음요^^)
그날도 엄마, 아빠와 함께 큰집에 갔었다. 함께 놀이를 하는 사촌언니의 아들, 나에게는 한 살 터울의 조카가 있었는데, 조카가 오지 않아 심심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몸을 베베 꼬며 나가자고 조르자, 아빠는 나를 데리고 야구장에 갔다. 나에게 콧바람을 쐬어주고 싶은 맘도 있으셨을 테고, 당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직관하고 싶기도 하셨을 테고, 그리고 좋아하는 야구를 딸에게 알려주고 싶은 맘도 있으셨겠지.
야구의 'ㅇ'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쫓아갔다가, 야구가 그렇게 긴 경기시간 동안 이뤄진다는 걸 알고는 학을 떼고 돌아왔다. 룰을 이해하지 못하면 재미가 없는 야구는, 아직 어린 나에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오로지 어른들 만의 스포츠였다. 그렇다고 어린이가 맥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지루함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야구라면 치를 떨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지도 않을 거라 했거늘,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대학교 1학년 때, 대학 방송국에서 활동했던 나는 같은 부서의 친구와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연습하고 매일 같이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친구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쪽으로만 내 말을 듣는 거였다.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들어 봤더니, 야구 중계였다.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는다고? 아빠 차만 켜면 들려왔던 야구 중계 소리, 아빠 쉬는 날이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던 야구 해설, 갑자기 친구가 멀게 느껴졌지만, 남자도 아닌, 나이 많은 어른도 아닌, 나와 비슷한 친구가 그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살짝 궁금해졌다. 그래서 따라 듣기 시작하자 친구는 나에게 야구의 룰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야구장에 갔다. 야구의 진짜 꽃은 직관이라며! 여자 둘이서 주황봉다리(로떼 팬들 다 아시죠?) 들고, 생맥 한잔 들고!
야구에 조금씩 빠져갈 때 즈음, 나는 야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야구 때문에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만, 야구 이야기도 하고 다른 관심사도 같다 보니 자연스레 사랑에도 빠지게 되었다. 친구가 나에게 야구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구 남친은 야구 세계로 들어가 있는 나를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꽉 걸어 잠그는 역할을 했다.
당시 8개 구단의 선수들의 이력을 모두 꿰고 있었던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야구 비하인드 스토리와 레전드 선수, 현역 선수들의 별명, 응원가를 알려주었다. 영화관 데이트도 좋았지만, 사직구장 앞 홈플러스에 들러 치킨과 맥주를 잔뜩 사들고 들어갔던 추억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렇게 야구 세계에 빠져들어 나는 내 몸속에 부산, 롯데 자이언츠의 피가 들끓고 있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결혼을 하고 부산을 떠나오며 사직구장을 못 가본 지가 이제는 15년도 넘었지만, 내가 가본 구장중에 가장 재미있고, 가장 응원할 맛 나고, 가장 짜릿한 공간이 사직구장이었다.(이렇게 말하면 엘롯기에서 '엘(쥐)기(아)'도 반기를 들겠지요~~ 워워 단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1등 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다던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남자를 여럿 만나다 야구를 좋아하는 남자와 역시 결혼했다. 신랑은 두산의 골수팬이다. 상대적으로 늘 상위권에 있고, 대부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두산은, 늘 하위권에 있는 롯데를, 그런 롯데를 응원하는 나를, 은근히 대놓고 놀린다. 이제 그만 두산으로 넘어오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롯데가 꼴찌를 해도 괜찮다고 영원한 롯데 팬이라고 이야기한다.
롯데가 꼴찌를 해도 영원히 롯데의 팬인 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제발 우리도 이번엔 우승 좀 해보면 좋겠다.(92년 우승 이후,,,,또르륵 또르륵... 대호님 떠나기 전에 갑시다! 우승) 지난 토요일, 드디어 2022년 프로야구가 개막을 했다. 2경기를 치르며 1승 1 무, 아직 갈길이 멀어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데, 오늘의 패배가 살짝 아쉽다. 구단의 사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완벽한 선수진들을 갖추었다고 해서 우승하는 건 아니니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절실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