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나의 화학반응
다른 사람
나는 많은 연애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주로 나와 대조되는 긍정적이고 활기 넘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해왔다.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와 닮은 차분한 사람’이라는 이상형을 거스르고 이상하게도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하고만 인연이 닿았다. 그러는 동안 꾹꾹 눌러 담게 된 나의 순수한 내면세계는 중화되어가는 듯했다.
나와는 달랐던 전 연인들과의 대화에서는 쇼펜하우어가 등장하는 일도 없었고 카프카를 알 필요도 없었다. 확실히 그들과의 만남은 지적 욕심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내심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를 그들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주는 진심 어린 애정만으로 만족스러웠고 고마웠다. 겉도는 대화뿐이었어도, 나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했어도 나는 충분히 가득 찬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비관적일 때에 몰이해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저들 나름의 처세술에 따라 그들이 생각하는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쟁은 연인 사이에 있어서 짜릿한 것이기도 했다. 서로 다르다는 점은 이러한 종류의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닮은 사람
마침내 나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에 대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을 때에도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해지기 까지는 긴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첫날부터 한동안 대화는 지루할 틈이 없이 이어졌다. 대화의 생명력에서는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호기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람과 나는 신기할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취미나 관심사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내가 겪는 내적 공허, 불안 등과 유사한 문제들이 있었고 가치관이나 각자가 가진 삶에 대한 처세술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에도 서로 양보해야 할 부분이 없을 만큼 그 사람과 나는 근본적으로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그랬기 때문에 대화는 막힘이 없이 매끄러웠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답장을 기다리기도 했고 유쾌한 마음으로 답문을 적어 보내며 하루를 보냈지만 그 사람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 마음속에 매번 찾아든 것은 집안의 공기만큼 눅눅한 공허함이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된 초반, 나는 모처럼 나의 언어들을 회복한 듯했다. 더불어 꾹꾹 눌러 담았던 나의 내면의 어둠까지 함께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에 그다지 좋은 기분만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통하는 비슷한 사람과의 관계는 나를 보다 자유롭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새삼 다시 찾게 된 그 익숙함은 다시 눅눅한 지하의 나락으로 떨어진듯한 패배감을 느끼게 했다.
나와 비슷한 취미와 재능을 가졌던 그 사람은 나와 열등한 부분마저 비슷했고 그 점이 내가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 없는 큰 이유였다. 사회성이 부족한 나와 하등 다르지 않은 수준의 사회성을 지녔었고 내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들에 그 사람도 똑같이 거부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대화에는 토론의 긴장감 대신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한 공감과 동조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쉽게 싫증이 나버렸다.
나와 닮은 그 사람과의 만남은 끝내, 내가 벌거벗겨진 듯한 비참함을 느끼게 할 뿐이었고 과거에 만났던 연인의 밝은 기운을 몹시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나의 내면을 깊이 이해해줄, 나와 닮은 사람과 만나기를 갈망했던 적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나를 중화시킬 밝고 쾌활한 사람이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근심으로 가득한 나의 머릿속을 그나마 단순하게 해줄 테니까.
이쯤 되면 내가 줄곧 ‘나와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하게 되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마음속 깊이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들의 밝은 에너지와 사람 사귐에 거리낌 없는 사교적인 모습에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동경했던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끌릴까, 닮은 사람에게 끌릴까?’라는 내 머릿속 논제에서 적어도 나는 전자였음을 확인했다. 연애감정을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것이란 나와 공통된 어떤 것보다는 나와는 다른 미지의 것에서 오는 긴장감이었던 것이다.
예술적 온도가 맞아서 서로에게 끌렸다던 존 레넌과 오노 요코도 사실은 그 이전에, 서로의 낯선 부분이 일으키는 호기심이 서로에게 끌릴 수 있었던 전제이지 않았을까?
2016. 4. 12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