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그들에게 물을 챙겨줬다면
손님이랑 물 가지고 싸운 거로 무슨 5화나 글을 끌고 가나 생각할 수 있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 버렸다. 보통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돌아볼 수 있다고 하지만 이일은 미약하게나마 소위 PTSD가 돋아 늘 말이 많아지곤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막내 피디로 일하던 당시 현장에서 겪었던 수많은 모욕들에 비하면 내상이 덜하는 것이었다. 드라마 현장을 누비며 들었던 온갖 욕지거리를 떠올릴 때면 어딘가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라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정제해야하지만 토마토 등과 있었던 일은 그냥 미간을 살짝 지푸려지는 정도다. 이게 어떻게든 을일수밖에 없는 근로노동자와 나름의 자기주도적 일을 한다 여기는 자영업자의 차이인건지, 아니면 신입사원일때 보다는 비교적 성숙해진 나의 마음가짐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당시엔 여러모로 초조했다. 쌍방으로 맞고소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당당하다고 한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몰랐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검색하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다.
토마토와 대질 조사를 받던 날은 외할아버지 상중이었다. 나는 검은 상복차림으로 서울대 병원을 나와 경찰서에 들러야 했다. 법원으로 넘어간 이후로는 집으로 법원에서 집으로 자꾸 무슨 서류가 날아왔다. 부모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일만큼은 집에서 끝까지 몰랐으면 했다.
심지어 법원으로 송치됐던 폭행 건은 검사에 의해 다시 재조사 명령? 이 떨어지기도 했다. 씨씨티비 증거만으로는 조사가 불충분하고 가해자 측이 쌍방을 주장하니 추가 조사를 해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 담당형사님은 전보다 약간 피곤해 보였고 검사가...하..같은 말을 혼자 중얼거렸지만 끝까지 예의 그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참아본 사람으로서 참고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십분의일 멤버 J형에게(폭행사건 당시 가장 먼저 달려와 키큰남을 압박했던 악마멤버_2화참고) 담당 형사님이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고 하자, 그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하야시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는 일이다. 이미 그쪽은 그 형사랑 술 한 잔 했을 수도 있어."라고 했다. 검찰에서 사건이 다시 경찰로 돌아왔다는 얘길 들었을 땐, 키큰남과 토마토 매니아가 경찰이 아닌 검사들과 술을 한 잔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내 상상일 뿐이다.
사건은 결국 약식 기소가 됐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어딘가 허무했다. 이런 게 법정 싸움인 건가. 딱히 남은 건 없고 소모되는 느낌. 만약 그날 내가 그들에게 웃으며 물을 챙겨줬으면 어땠을까. 그분들도 우리 매장의 단골이 되어 지금도 가끔 십분의일을 찾는 사람이 됐을까. 이전에 노부부 손님처럼 내게 만 원 짜리도 한 장 쥐어줬을까. 같은 일이고 같은 말이어도 아 다르고 어 다르고, 그 작은 차이가 무섭다. 매장의 룰이고 뭐고 뛰어가서 물을 직접 따라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물조차 서빙하지 않고 싶은 사람도 있다. 손님이고 사장이기 전에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p.s
아 담당 형사님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한 번은 사건 당일 일 도우러 왔던 그 친구가 함께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간 적이 있는데
친구가 조사를 받던 중 형사에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여자였다.
그는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에 잠시 동요를 일으키더니
음... 여기 화장실이 여기 피의자들이랑 다 같이 쓰는 곳이어서...
하고는 한참을 설명해 형사과 밖에 있는 방문자 화장실을 안내해 줬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화장실을 물어보자
그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까 언급했던 수감자 화장실을 가리켰다.
저기요.
여러모로 재밌고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