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곧 그의 하드캐리가 시작됐다
결국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몇 번의 참고인 조사 등이 더 있었다. 다하면 4-5번은 경찰서에 드나든 것 같다. 출석이 많았던 건 사건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기 때문이다.
지난 화에 적긴 했지만 막판에 가서 토마토 매니아는 대놓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봉인해제였을까. 한 번 트인 그의 입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거침이 없었다. 진정 상스러운 말을 뱉은 건 많지 않다. 대신 영화에 나올법한 갑질 대사들을 쏟아냈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줄줄 그런 말들을 뱉어내 평소 주머니에 이럴 때를 대비한 대본을 넣고 다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 였다. 당시 그 말을 들을땐 묘욕감을 넘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내가 그의 가면을 벗겼다...그런 마음이었을까?
근데 이거 보니까 키큰남자보다는 토마토 매니아가 더 나쁜 놈이네. 이거 완전 모욕죄야.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모욕죄?
들어보니까 모욕죄 구성요건에 다 해당되는데 뭘. 그리고 오빠가 확실히 모욕을 당했잖아 아니야?
어... 그건 그렇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후배 E는 이 부분을 지적했다. 나 역시도 줄곧 진짜 악당은 물러버 키큰남이 아닌 토마토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 위에 있던 토마토... 조사 받는 순간에도 키큰남에게 법률적 대응 방안 등을 지시하는 토마토 매니아가 상상됐다. 이성을 되찾은 침착한 어투로 키큰남을 나무랐을 것이다. 정신차려, 지금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야. 그러게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했어 안했어! 결국 나는 토마토와 키큰남 둘 모두를 모욕죄로도 고소했다. 그런데 씨씨티비가 있었던 폭행 사건과 달리 모욕죄를 입증할 수 있는 오디오는 없었기 때문에 대질 조사를 해야했다. 사건이 지나고 약 한 달 뒤, 경찰서에서 토마토를 만났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온 토마토는 차분하고 정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토마토는 강남의 한 유명 호텔 지배인이었다. 오픈 초기부터 십분의일엔 근처 N호텔 임원들이 단골로 왔다. 아마 그들 중 한 명이 업계 지인인 토마토에게 이곳을 추천했으리라. 어쩐지 서비스업 운운하면서 상대를 가르치려하는 고압적인 태도, 남의 주방까지 들어와 경찰에게 위생 상태를 체크해달라는 식의 교활한 모습까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대질 조사는 어색했고 긴장감이 흘렀다. 담당 형사를 앞에 두고 각자 진술하는 일종의 삼자대면이었다. 말이 길어질수밖에 없었다. 토마토는 키큰남과 마찬가지로 쌍방 모욕을 주장했다. '일단 쌍방으로 밀고 가자.' 그게 그들의 작전인듯 했다. 토마토는 내가 처음부터 불친절하고 손님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이 일이 시작된 거라는 주장을 폈다. 아 그런데, 여기서 갑작스런 담당 형사님의 하드캐리가 시작됐다.
네, 그러고나서 담배를 피셨다구요?
아 그게... 잠깐 불만 붙였다 바로 끈건데
여기서 끄라고 해서 껐다면서요? 담배는 왜 피셨어요?
영업시간도 이제 끝나서 다른 손님도 없고,
영업시간 끝나면 여기 개인 사유지에요. 남의 집에서 담배피시면 안되죠.
아 예예...
통쾌했다. 딱딱하고 기계적이기만 했던 저 형님이 저런 포스가 있었다니... 참경찰이었구나.
사실 담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혹시나 해서 내가 진술서에 썼던 것인데 딱딱이 형님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작은 팩트는 그날 현장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말해줬고 오히려 내가 당했다 라는 토마토의 주장은 점점 신빙성을 잃어갔다. 토마토도 역시 보통은 아니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눈에 띄게 기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법정 영화를 보다보면 굳이 판결이 나오지 않아도 누가 진짜 이 사건의 피해자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딱딱이 형님의 현란한 드리블덕에 초조했던 대질 조사 현장은 한 편의 법정 드라마로 마무리 됐다.
그리고 4개월이 흘렀다.
*토마토 매니아는 치즈플레이트 구성 중 하나인 방울토마토를 마치 무한리필 고기집에 온것처럼 계속 요구했다.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한 악의적이고 교묘한 갑질이었다. (3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