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이런 곳이 있었어?
키가 훤칠하고 말끔한 양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큰 소리로 냈다. 테이블의 분위기는 매장에 들어올 때부터 보인다. 누군가는 수줍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여기 영업하시는 건가요~'라고 묻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지~?' 하며 지인에게 안내하는 가이드형도 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은 여러모로 기세가 좋은 스타일이었다. 매장을 두리번거리며 좋은데? 등을 연발하며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했다.
에? 물이 셀프라고요?
함께 온 일행들에게 주문한 와인을 평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들어올 때부터 소리가 컸던 키 큰 남자였다. 나는 물이 셀프인 이유와 어디서 물을 가져올 수 있는 다시 한번 설명하고 돌아섰다.
아니 무슨 와인 바가 물이 셀프야?
카운터로 가는데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큰 목소리. 그들은 수시로 나를 찾았다. 치즈 플레이트에 있는 크래커를 좀 더 달라거나, 토마토를 더 받을 수 없겠냐는 등의 요청이었다. 메뉴의 일부를 더 달라고 하는 손님들은 흔치 않다. 그 중 한명이 방울토마토를 특히 좋아했다. 신경 쓰였지만 전부 들어줬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활짝 웃었다.
서비스라는 게 말이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 사실 이런 데는 여차하면 한방에 가게 할 수도 있어.
특별히 귀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매장에서 손님들의 이야기는 참 잘 들린다. 직원 한 명 없이 혼자 일할 때는 꼭 교실 속 왕따가 된 기분이 드는 날도 있다. 모두 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있지만 나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일을 마치고 쉬러 온 사람들과 한창 일을 하고 있는 사람. 그 다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가끔은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키 큰 남자가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듣겠구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
마감 10분 전. 테이블마다 곧 영업이 끝남을 고지했다. 키 큰 남자가 앉아있던 테이블에는 유독 정중히 그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약간 볼멘소리로 아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근데 물 좀 갖다 줘요.
평소 같았으면 물을 직접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FM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있다. 초보 사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다른 건 들어줘도 물만큼은 가져다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여기의 룰을 따르게 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 똑같이 웃으며 (어쩌면 그는 이 포인트에서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물은 저쪽에서 드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실쭉거리며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 시발 내가 물 가지러 간다, 가'
돌아서는 뒷통수에 날선 혼잣말이 꽂혔다. 영업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고 이제 남은 테이블은 거의 없었다.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갔는데 이런... 하필 셀프바의 물이 거의 다 떨어졌다. 사실 그럴 수밖에, 영업이 끝난 시간이었으니까. 그때 그가 정말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물 없어요. 여기 물 다 떨어졌다고!!!!
나가던 손님들이 놀라 돌아봤다. 나도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물을 가지고 갔다.
여기 물 드릴게요. 근데 저희 영업시간이 다 끝나서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키 큰 남자
알았다고 그 말을 몇 번을 하는 거야. 와, 물 가서 마시라더니 이제 가져다주네?
그때 앞에 있던 다른 남자가 가세했다. 토마토를 계속 달라하던 토마토 매니아였다.
토마토 좀 더 가져다주실래요?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토마토는 일종의 그의 무기였다. 그는 내가 영업마감을 알리러 갈 때, 물을 서빙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때 등 특정 타이밍에 맞춰 토마토를 요구했다. 네놈이 기어코 물을 대령하지는 못하겠단 말이냐? 그럼 토마토라도 가져오너라. 그렇게 일부러 나를 자극했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저...죄송한데 이제 저희 영업이 끝나서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다 물 한 잔만 좀 따라봐요. 싫어? 그럼 내가 한 잔 따라줄까?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에게 물병을 뺏어 들고 물을 따라주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토마토 매니아, 그 광경을 재밌다는듯 서서 바라보는 키큰남자, 그 사이에 앉아 표정없이 관망하는 여자 일행. 웃음에 웃음으로 대항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이미 내가 웃음기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 끈을 놓으면 안됐다. 이제 이건 누가 물을 따르냐마냐 따위의 문제가 아닌 누가 끝까지 웃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더 이상 매장에 남아있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어느 새 마감한 와인 바에서 한 편의 연극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대사를 칠 차례였다.
허허...정 그러시면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마토가 외쳤다.
아까 따르랄 때 따르지 왜 자존심을 부리고 그래 이 썅놈의 자식아!!!
토마토 매니아가 무너졌다. 지독한 눈치게임이 끝났다. 나도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물병을 옆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놨다.
영업 끝났다고... 다 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