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과 Oct 14. 2024

물 한 잔만 따라봐요

누가 끝까지 웃을 것이냐의 눈치 게임


물 얘기를 했더니 자연스레 경찰서에 다녀온 추억이 생각난다.


때는 2017년도 겨울, 오픈 1년 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시점이었다. 십분의일은 감사하게도 6개월 만에 일종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몇몇 매체에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 숨겨져 있는 아지트라는 부제로 꾸준히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자연스럽게 손님이 늘었고 매장은 바빠졌다. 하지만 직원이 없었다. 주말에는 멤버들이 와서 도와줬지만 평일이 문제였다. 적당히 운영되는 가게는 평일이 더 문제다. 어떤 날은 갑자기 바쁘고 또 어떤 날은 한가하니 직원을 뽑기도 애매하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매장은 거의 만석이었고 급히 부른 친구와 둘이서 일하던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야~ 이런 곳이 있었어?


키가 훤칠하고 말끔한 양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남아있던 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자 2명, 여자 1명. 총 3인


테이블의 분위기는 매장에 들어올 때부터 보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여기 영업하시는 건가요~' 등의 멘트를 하는 샤이 손님이 있는가 하면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지~?' 지인에게 안내하는 가이드형, 그냥 왁자지껄 기분 좋은 손님 등 다양한 타입이 있다. 이번에 들어온 분들은 여러모로 상당히 기세가 좋은 스타일이었다. 매장을 두리번거리며 좋은데? 등을 연발하며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했다. 목소리가 컸다. 


에? 물이 셀프라고요?


앞에 앉은 여자에게 주문한 와인에 대해 한참을 평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들어올 때부터 소리가 컸던 키 큰 남자였다. 나는 물이 셀프인 이유와 어디서 물을 가져올 수 있는 다시 한번 설명하고 돌아섰다. 


아니 무슨 와인 바가 물이 셀프야?


카운터로 가는데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큰 목소리. 그리고 곧이어 각종 주문이 시작됐다. 치즈 플레이트에 있는 크래커를 좀 더 달라거나, 토마토를 더 받을 수 없겠냐는 등의 요청이었다. 토마토를 두 번이나 더 달라고 하는 테이블은 처음이었지만 전부 들어줬다. 


서비스라는 게 말이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 사실 이런 데는 여차하면 한방에 가게 할 수도 있어. 


남자는 쉴 새 없이 이곳에 대한 평을 했다. 대부분 뭔가 부족하다, 마음에 안 든다,라는 식의 얘기였는데 워낙 소리가 커서 주변 테이블은 물론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역시 틈틈이 무언가를 요청했다. 그때마다 일부러 더 웃으면서 응대했다. 


마감 10분 전. 테이블마다 곧 영업이 끝남을 고지했다. 7번 테이블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 번호가 7번이었다) 약간 볼멘소리로 아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근데 물 좀 갖다 줘요.


아마 평소 같았으면 물을 직접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FM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들이 보여준 손님으로서의 매너는 진상이라고 치부하기엔 훨씬 더 교묘하게 악랄한 편이었다. 초보 사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다른 건 들어줘도 물만큼은 가져다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여기의 룰을 따르게 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 똑같이 웃으며 (어쩌면 그는 이 포인트에서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물은 저쪽에서 드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실쭉거리며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일어나며 '하 시발 내가 물 가지러 간다, 가'라고 했다. 영업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고 나는 다른 테이블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물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이런... 하필 물이 다 떨어졌다. 사실 그럴 수밖에, 영업이 끝난 시간이었으니까. 그때 그가 정말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물 없어요. 여기 물 다 떨어졌다고!!!!


나가던 손님들이 놀라 돌아봤다. 나도 놀랐지만 놀리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물을 가지고 갔다. 


여기 물 드릴게요. 근데 저희 영업시간이 다 끝나서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키 큰 남자


알았다고 그 말을 몇 번을 하는 거야. 와, 물 가서 마시라더니 이제 가져다주네?


그때 앞에 있던 다른 남자가 가세했다. 토마토를 계속 달라하던 토마토 매니아였다.


토마토 좀 더 가져다주실래요?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토마토는 일종의 그의 무기였다. 그는 내가 영업마감을 알리러 갈 때, 물을 서빙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때 등 특정 타이밍에 맞춰 토마토를 요구했다. 네놈이 기어코 물을 대령하지는 못하겠단 말이냐? 그럼 토마토라도 가져오너라. 일부러 나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저...죄송한데 이제 저희 영업이 끝나서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다 물 한 잔만 좀 따라봐요. 싫어? 그럼 내가 한 잔 따라줄까?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에게 물병을 뺏어 들고 물을 따라주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토마토 매니아, 그 광경을 재밌다는듯 서서 바라보는 키큰남자, 그 사이에 앉아 표정없이 관망하는 여자 일행. 웃음에 웃음으로 대항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이미 내가 웃음기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 끈을 놓으면 안됐다. 이제 이건 누가 물을 따르냐마냐 따위의 문제가 아닌 누가 끝까지 웃을 수 있고 여유를 잃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상 매장에 남아있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어느 마감한 와인 바에서 편의 연극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사를 칠 차례였다. 


허허...정 그러시면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마토가 외쳤다. 


아까 따르랄 때 따르지 왜 자존심을 부리고 그래 이 썅놈의 자식아!!! 


토마토 매니아가 무너졌다. 지독한 눈치게임이 끝났다. 나도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물병을 옆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놨다.  


영업 끝났다고... 다 나가시라고요!!!!

 



      



        

작가의 이전글 물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