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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Oct 18. 2024

경찰서에서

치욕의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제가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셨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어제 멀쩡해보였는데? 말투는 고상했지만 전혀 사과같지 않은 사과 의사표시 전화였다. 어제 매장 앞에서 들어갈 때까지 씩씩거리며 반말을 내뱉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니 무엇엔가 취하긴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소를 취소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에, 정확히 하면 경찰서 형사과에 가봤다. 드라마를 할 때 경찰서 세트장은 몇 번 가봤는데 진짜 경찰서에 오다니. 형사과의 풍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마 속 풍경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어깨라도 부딫혔다간 바로 죽빵을 날릴 것 같은 형님들이 곳곳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어깨에 수건을 건 채 이를 닦으며 오늘 너도 당직이야?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내 사건을 담당한 분은 비교적 젊은 분이었다. 짧은 머리에 크고 다부진 체격, 뿔테 안경을 낀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 밖에서 만나도 경찰이라고 하면 백프로 믿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필요한 말만 딱딱 빠르게 묻는 기계같은 모습이 일을 잘 한다는 인상을 줬다. 말수가 많은 분이 아니었는데 사건에 대해 설명해야할 때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사실 이 폭행이라는 게 제일 어려운 거에요. 살인같은 건 차라리 쉽거든. 근데 누가 둘이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서 싸우고 나왔는데 서로 자기가 맞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게 답이 없는 거거든. 근데 선생님 사건은 그나마 이 씨씨티비가 있어서 쉽긴한데...


그런데 문제는? 키 큰 남자가 자꾸 쌍방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심플하면서도 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기둥 뒤에 가려졌을 때 나한테 맞았다는 것이었다. 십분의일 카운터 앞에 기둥이 하나 있다. 씨씨티비는 카운터와 홀 일부를 비추고 있는데 자연스레 기둥이 홀의 일부분을 아주 조금 가린다. 나름 카메라에 사각이 있는 것이다. 정말 사람 하나가 겨우 가려질 사각인데 영상을 보면 키큰남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 때마다 그 기둥 뒤를 왔다리 갔다리 한다. 키큰남은 바로 그 기둥을 지나치는 찰나, 본인이 맞았다고 했다. 


뭔데, 보자 보자. 내가 딱 보면 알아. 비디오 판독은 내가 전문이야.


갑자기 경찰서 다른 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운동복 차림의 아저씨들이 모니터 앞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여기 봐바. 여기서 딱 밀치잖아. 그러니까 한 번 싹 돌고

기둥에서 비끼고, 안 밀리려고 한 번 꺽네.


마치 스포츠 중계 하이라이트라도 보듯 5-6명이나 되는 경찰들이 내가 종이인형처럼 휘둘리는 걸 직관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무력하게 휘둘리는지 평하기 시작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전반적인 결론은 이건 과학적으로보나 직감적으로보나 쌍방이 될 수는 없겠다는 것이었다. 평은 담당자가 "아니 됐어요. 다 좀 돌아가세요."라며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돌아볼 때까지 계속 됐다. 이 기이한 풍경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쌍방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담당자는 이런 폭행 사건은 검찰로 넘어가봤자 서로 실익이 없으니 가능하면 합의를 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본인이 절대 그런 걸 주도할 수는 없다, 당사자가 알아서 해야하는 부분이다. 라며 조심스러워했다. 


합의는 생각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다들 합의금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변호사 친구들은 이렇게 악질적인 놈들은 처음부터 세게 나가야한다며 구체적인 판례와 액수를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합의금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단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전화 한 통을 한 이후로는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고 어떤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다. 나라면 매장으로 한 번 정도는 왔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그렇게 치욕스런 밤을 보내고 여러 번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진술하고 대처하는 것에 대한 값을 어떻게 금액으로 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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